아무래도 추석연휴 싸움에서 가장 빛을 못 본 영화가 될 듯 합니다만
저는 퀴즈왕을 굉장히 기대했었습니다. 바로 '장진'이라는 이름 때문이죠.
장진에 대해선 꼭 이야기가 나오는게 두가지 있습니다.
기막힌 사내들과 강우석 입니다.
기막힌 사내들은 당시 어렸던 저에게 충격과도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연극과 영화의 형식을 넘나드는 이 영화는 독특하면서 중독성 높은
장진식 대사를 대중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한 영화였으며,
신하균을 비롯한 지금은 영화계에 아주 중요한 이름들이 된
장진사단을 소개한 영화였죠.
그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건 한 영화청년의 가늠할 수 없는 '재능'이었으며,
둔탁하면서도 거칠은 '기막힌 사내들'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장진이 이 후로 장르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영화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만개시킬 수 있었다면 훗날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죠스'에 버금가는 역사적인 데뷔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니면 듀얼 :-))
그렇지만...
(또 하나의 이야기)
사실 강우석 때문에 장진의 영화가 맛이 밍밍해졌다고 하는 건 억측일지 모릅니다.
정작 본인들은 그런 얘길 하지 않거니와(할 리가 없지만!)
어쩌면 젊은 감독에게 흔치 않게 오곤 하는 슬럼프가 길어졌고,
기막히게 타이밍이 그렇게 겹쳤을지도 모르죠.
하긴 돌이켜보면 장진의 영화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는 여자' 또한
강우석과 함께 할 때 나온 영화이긴 합니다.
최근에 IP티비를 통해 다시 본 '킬러들의 수다'는 그때의 감상만큼이나
장진식 유머가 빛이 바랜 영화도 아니었구요.
하지만 강우석이 항상 얘기하는 '대중영화는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좋은 말일 수도 있지만 개성있는 작가들에게 독약이 될수도 있습니다.
사실 장진영화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어요.
게다가 고증 같은거엔 크게 관심도 없어 보이죠.
항상 묵직한 사건들을 소재로 즐겨 쓰지만 그 문제의 해결은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문제를 둘러싼 인간들의 모습과 그들의 수다. 수다. 그것이 장진 영화의 본질이었죠.
기막힌 사내들에서 연쇄 살인범이 잡히는 과정이 기억 나십니까?
킬러들의 수다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꺼야!"라고 걱정하던 킬러들이 빠져나오던 순간은요?
결국 이런 단점들을 덮을 수 있었던건 매콤한 장진식 대사와 개성들이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거룩한 계보'를 보면 장진식 설정만이 남겨진 채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있었죠. 미소녀 캐릭터의 문신은 맘에 들었지만서두요.
(지금의 이야기, 퀴즈왕)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근작 아들,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보지 않은- 퀴즈왕을
기대했던 건, 이 영화가 어쩌면 순수한 코미디에 대한 장진식 초심이 담긴 영화일지도
모르겠단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감동적인 뒷얘기를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영화의 시놉부터 (역시나 말은 안돼지만) 영화는 장진식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죠. 그리고 꽤 오랜시간 함께 한 그의 배우들이 까메오를 자처하며 출연을 하는 등
영화에 대한 기대치는 올라갔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이 영화를 '아는여자'와 '간첩 리철진' 바로 뒤에 놓으려합니다.
굉장히 맘에 들었단거죠.
영화는 뚝 잘라 두개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초반부의 경찰서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야말로 연극판을 그대로 옮긴 느낌.
오프닝부터해서 마타니 코우키의 느낌도 좀 나고 아주 매력적입니다.
잘 분배된 대사들이나 그것들을 잘 소화해낸 좋은 배우들이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 갑니다. 장진 본인의 출연은 이제 스스로도 즐기는 느낌이라
나쁘지 않습니다만.. 이 양반은 혹시 아는여자의 그 형사인가요? +_+
모처럼 북작북작하는 소동을 보며 웃다보면 영화는 원래 이 영화의 소재였던
퀴즈쇼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한 영화 안에 파트 2.
약간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떠오르는 설정들도 있긴 합니다만 크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닙니다.
캐릭터들의 현명한 퇴장도 아주 능숙합니다.
절정으로 가서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렇게까지 벌이시나..?'하던 결말도
나름 성공적으로 해냅니다.
(그래서 퀴즈왕은)
잘빠진 대중영화이자(물론 개그코드가 안맞으면 지옥같은게 코미디 영화이긴 합니다.)
초기의 장진의 매콤한 향기와 아는여자의 절제도 있는 균형잡힌 영화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도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공공의 적 1편에서도 보였던 '이상한 정의감'이죠.
공공의 적의 강철중은 마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돌려서 팔던 범죄자였습니다.(경찰이지만)
하지만 그는 이후에 잔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공공의 적'을 만나서 분노를 하죠.
이 부분이 저는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개입된 '정의의 시선'이 캐릭터를
지배하는 듯한, 도덕적 부자연스러움이었죠. 물론 그가 뱉은 "사람이 그러면 안돼는거다"는
맞는 말이지만, 그런 대사를 하기엔 이미 강철중이란 캐릭터는 많은 타협을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낸 범임을 괘씸죄로 잡으려고 발악하는게 더 어울릴 정도였죠.
이번 퀴즈왕의 주인공 중 한명인 한재석은 이런 '강우석 같은 정의감'이 생기는 캐릭터입니다.
사실 클라이막스를 담당한 이 설정은 엉망이에요. 킬러들이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묘사 만큼이나
퀴즈왕에서 해결사 2인조가 구린 냄새를 맡고 이에 대처하는 묘사는 흐릿합니다.
게다가 한재석은 (역시나) 정의감에 불현듯 악당을 궁지로 모는 묘책을 생각해낼 캐릭터가 아닙니다.
사실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중 가장 악인에 가깝거든요.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에 대한 강박, 아니면 정의에 대한 강박.
하긴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가 현실 그대로의 악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겠죠.
장진 특유의 휴머니즘에도 코드가 안맞았을테구요.
불편한 점들을 늘어놨지만 비교해봤을 때 맘에 드는 쪽으로 더 기우는 건 확실합니다.
문제를 품고 있지만 여전히 좋은 영화에요. (마치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처럼 말이죠. )
사족 - 정재영이랑 너무 같이 한단 비판을 의식한 건 아니겠습니다만 세 작품 연속 결별이군요.
이쯤되면 주성치와 오맹달의 결별도 생각나고.. ㅎㅎ 암튼 김수로씨도 장진식 대사가 아주
입에 잘 붙더군요. 다음 작품도 기대해보겠습니다. 소재만 보면 '아는여자' 감이네요.
사족2 - 송영창님..하.. 정말.. 그래도 전 좋아하렵니다. 연기 정말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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