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무려 남녀공학에 남녀합반 고교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춘기 시절 어디선가 어긋나버린 “이성과의 정상적인 관계 맺음”덕에
그렇게 남자들이 불편할 수가 없었더랬고 그래서 철저히 내외하고 살았습니다.
고교시절 앞뒤자리에 남학생이 앉아 있으면, 하루종일 경계모드였습니다…
뒷자리 남학생이 지우개라도 좀 빌려달라고 등이라도 찌를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수,순진녀?!?
그치만 여학생들만 있으면 어느새 광년모드;;;
그래서 우리반 여학생들은 항상 저를 다중이라 불렀지요. ㅋㅋㅋ
남학생들 사이에서 제 이미지는 “온실 속 화초”,
여학생들 사이에서 제 이미지는 “XX동 미친X”
쨌든! 이런 저에게 여대는 차라리 맘편한 파라다이스였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대학 새내기 시절.
그래도 또 여대랍시고 미팅은 뻔질나게 했었었죠.
사건은 저의 첫 소개팅에 관한 이야기.
고등학교 선배님이 근처 남녀공학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같은 동아리에 참한 남학생이 하나 있다며,
저에게 이제 실속없는 미팅일랑 고만두고
“소개팅”을 한 번 해보라!!시며 주선을 해주셨습니다.
제 대학 새내기 시절 당시는,
“소개팅”이라 하면 주선자가 소개팅인과 대동하여
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맹글어 주고 빠지던 시절이었지요.
선배언니와 소개팅남을 저희 학교앞 커피샵에서 만나기로 하고,
저는 일대일 소개팅이 처음이었던 터라,
왠지 미팅 때처럼 미친듯이 때빼고 광내고 나가는 일은 ‘촌시렵다’라고 생각했었기에
여대생 특유의 수수미(ㅋㅋㅋㅋㅋㅋㅋㅋㅋ)를 뽐내며 자리에 나갔습니다.
선배언니와 함께 여대 앞의 커피샵에서 만난 소개남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던 풋풋한 경제학도 새내기였습니다.
첫 만남 때는 언니의 주도 하에 주로 새로운 대학 생활 이야기,
언니랑 나랑 다녔던 고등학교 이야기,
언니랑 소개남의 동아리 이야기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마무리하였고,
언니가 그 아이에게 “야를 집까지 데려다 줘라!!” 코치하시어
저희는 풋풋하게 학교 앞에서 222번 버스를 타고
저희집까지 뻘쭘-_-하게 오게 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잉 뿌잉뿌잉..
(새삼 그때 기억 떠올리며 남들한테 싱겁기 그지 없을 일을
“달달~하다”고 우겨보는 바리케이트녀…)
소개남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어요.
그저 제가 재잘재잘 떠드는 수다에 빙그레~ 웃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점잖은 아이였지요.
소개남은 저를 아파트 입구까지 바래다 주며
집에 가면 “음성 남기겠다.”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삐삐 세대”. ㅋㅋㅋㅋㅋ
저는 첫 소개팅을 마치고 밤에 누워서는 가심이 두근거려서 밤잠을 설칩니다.
밸 것도 없었는데 왜 두근거려 밤잠을 못 이룬 것일까요? ㅡ,.ㅡ
소개남이 집에 들어가서 남긴 음성메세지 내용은.
“오늘 첫만남 즐거웠다. 너의 재잘거림이 귀엽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나는 니가 참 귀엽고 맘에 드는구나. 앞으로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
바리케이트녀의 특성상,
저는 그날 밤에 이미 소개남과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혼자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황혼도 함께 바라보고,
그렇게 망상의 성을 쌓았다 허물었다 하면서 밤잠을 설치게 된거죠.
그리고 계속 오가는 음성메세지들 속에서 2차 약속을 잡게 되고,
우리는 종로 모극장에서 죽음도 갈라 놓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마 이때가 제가 남자사람과 첨 영화를 본 걸꺼에요.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던지,
엄마가 사준 투톤 바바리를 곱게 차려입고 소개남과 학교 앞에서 만나
극장까지 가는 길 또한 어찌나 가슴이 터질 듯 하던지요. ㅠㅠ
그리고 영화시작 전까지 시간이 남아
또 커피샵에 들어간 저희는 또 제가 미친듯이 수다를 떨고
소개남은 빙그레 듣고 있고..
(대체 난 뭔 얘기를 그렇게 열심히 했던걸까요. --a)
세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어케 진행되는지 내 알바 아니고,
그저 긴장과 두근거림 속에 정신이 혼미했던 것 같습니다.
아아아- 풋풋해. ㅎㅎㅎㅎ
그렇게 영화 감상 후 소개남은 또 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고, 빠빠이하며,
이날도 “음성 남기겠다.” 했어요.
저는 둑은둑은 가슴터질 듯 음성메세지를 기다리며 전화기 앞 망부석 대기모드.
소개남이 그날 남긴 음성메세지에는
“오늘도 너의 이야기는 참말로 재미나더구나.
넌 좋은 아이인 것 같다. 나는 니 얘기를 듣는게 좋다.
우리 오늘부터 사귀어보지 않겠느냐!!!!!!!!!!!”
>>ㅑ!!!!
드디어 나에게도 핑크빛 새내기 호시절 챤스가 왔구나!!!!
저는 또 미칠듯한 심장박동과 발그레 볼을 시전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너무 기쁘고 두근거려 누구한테 말하기도 조심스럽더라구요.
하지만, 잠자리에 누워서 잠이 올 리 만무하고,
기쁨과 환희와 핑크빛 기분은 점점 걱정과 불안감으로 변해갑니다.
‘하아- 나 진짜 연애 시작하는 건가?
헙- 그럼 나 이제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돼지??
내가 무슨 얘길 해야 소개남이 좋아할까?
손은 언제 잡는거지? 나 그럼 이제 뽀뽀도 해보는건가???
아, 연애 시작하면 뭐부터 해야 하는 거지??
내일 당장 나는 아침부터 뭘 해야 하는 건가!?!?’
이런 되도 않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두근거리던 가슴위에는 어느덧 누군가
설악산 울산 바위를 옮겨다 놓은 것 같습니다.
호흡이 가빠지며 숨쉬기가 힘이 듭니다.
밤을 꼴딱 지샜습니다.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옵니다.
‘하아- 연애란 이리도 힘든 것인가!!!!!!!!!!!!’
라는 생각이 ‘사귀자!’라는 말을 들은 지,
채 여섯시간이 되지 않아서부터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언제 가지는거지??
어디 가지? 머하지? 아 이런 고민은 내가 안해도 되는건가?
사귀니깐 이제 연락은 하루에 몇 번 해야 하는거지?
일주일에 몇 번 만나면 좋을까!?!?’
이런 어이없는 바리케이트녀..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혼자 머리 싸매고 덜덜 떨며 하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소개남의 삐삐가 도착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무슨 내용일까!! 세 번째 만남에 대한 지령일까!?!’
막 이러면서,
밥을 먹어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
숨이 가빠서 한숨만 늘어 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친구들은 집에 뭔일 있냐며, ㅎㅎㅎㅎㅎㅎㅎㅎ
남친 생긴지 며칠안되는 애가 왤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냐며 물어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ㅜㅜ
늬들은 몰라.. 내 고민을.. ㅜㅜ
그 당시에도 저는 이런 제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누구한테 말해봤자 저만 미친X 될 것 같아서
베프 딱 한 명한테만 저의 이런 심경을 말해보았지요.
저의 베프는 그러드라구요.
“보통은 그 감정이 설레임과 두근거림으로
엔도르핀 퐁퐁 솟게 해주는 좋은 감정인데,
너는 왜그르냐.”
저는 소개남과 사귀기로 한 후,
며칠간 정말 괴로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그래도 어른들의 “사람, 세 번은 만나야 한다!”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줏어들은지라,
세 번째 만남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학교 근처의 맛있다던 파스타&피자집을 알아온 소개남이
맛난 화덕피자를 사줬는데도 그게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
그날은 아예 목구멍도 턱 막혀 수다도 안떨어지더군뇨.
불편한 마음에 어서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소개남은 그런 제게,
“몸이 안좋아 보인다.”며 빨리 집에 들어가자 하며
저를 집에 까지 바래다 주었어요.
아. 이제와 생각하면 정말 소개남은 눈치도 빠르신 매너남이셨네요.. ㅠ_ㅠ
그렇게 도망치듯 집에 들어온 저는 드디어 항복!을 외쳤습니다.
사람이 일단 살고 봐야지,
나란 인간 연애는 못할 인간!!!
이렇게 결론 내리고,
사귀자란 소리 들은지 사나흘쯤 되던 날,
차마 네 번째 만남은 정하지도 못하고,
그날 밤.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소개남의 삐삐에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음성메세지를 남겼습니다.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 너는 참 좋은 아이이다.
그런데 내가 좀 이상한 것 같다.
너가 좋은 것 같은데, 너가 좋은 아이란 건 알겠는데,
“사귄다”는 것이 나를 너무 불편하게 만든다.
숨이 가쁘고 가슴에 돌덩어리가 올려진 것 같아 밤마다 잠을 못 이룬다.
내가 나도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마 처음이어서, 내가 어딘가 좀 비정상이어서 그런 것 같다.
너한테 너무너무 미안하다. 더 좋은 여자 만나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음성메세지를 싸지름과 동시에 저는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ㅜㅜ
제 가슴을 누르고 있던 울산 바위가 도로 제집에 돌아갔습니다!!!
숨이 가쁘지도, 가슴이 턱턱 막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발 뻗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성숙하고도 점잖고도 매너 좋던 소개남.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제 삐삐에도 음성메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래. 너의 마음 내 다 이해한다.
너에게 그런 괴로움이 있었다니 참 힘들었겠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거다. 아직 니가 준비가 안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그런 너를 사로잡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인 것 같다.
마음 편하게 가지고, 앞으로 더 좋은 남자 만나길 빈다.”
캬아-!
지금 생각하니 새삼 아쉬운 소개남.
참 점잖은 호남이었건만..
내 그 이후, 십수년이 지나는 동안 그만한 아이를 만나지 못했건만...
어흑...
이렇게 촉귀신 바리케이트녀의 첫 소개팅남이자
최초의 “사귀자” 시전남은 멀리 떠나가셨습니다.
그 당시엔 얼마나 가슴후련하고 살 것 같았던지.. ㅎㅎㅎㅎㅎㅎ
나는 왜 그랬던건지.. ㅎㅎㅎㅎㅎㅎㅎㅎ
그 때 병원이라도 가 볼 것을..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후로도 전... 쭈욱 비슷한 감정으로 모쏠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ㅜㅜ
담백하게
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