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아직 미성년인 정신과 환자 자녀에게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 서명을 받은 건 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나왔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 아래 인권위)는 21일 보호 의무자가 아닌 미성년 딸에게 아버지의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아래 DNR 동의서)에 서명하게 한 A 병원 원장에게 환자 당사자 의견을 존중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아울러 관할 구청장에게도 관내 의료기관에서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지도·감독을 철저히 하라고 했다. | ▲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버지가 정신질환자란 이유로 미성년 자녀에게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에 서명하게 만든 병원이 당사자와 자녀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결정했다. ⓒ rawpixel.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만 15세 딸에게 아버지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 요구
진정인 김아무개(49·남)씨는 "지난해 6월 A 병원에서 진정인이 심근경색이 없음에도 진정인의 딸에게 심정지나 호흡곤란이 발생할 경우 사망을 해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라고 강요해 결국 딸이 각서에 서명 날인하였다"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피진정인인 A 병원 정아무개 원장은 "본원에 중환자실이 없어 심근경색이 오더라도 즉시 치료할 수 없어 종합병원에 입원해 평가가 필요한 상황인데 진정인의 딸과 아들은 종합병원은 가지 않겠다며 본원에 입원하길 원했다"면서 "이에 보호자인 진정인 모친(80세)에게 계속 연락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아 진정인의 딸(당시 만 15세)과 아들(당시 만 10세)에게 심근경색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는 것은 필요한 조치였다"라고 해명했다.
A 병원에서 진정인 딸에게 서명받은 DNR 동의서에는 "환자에게 심정지나 호흡곤란이 발생할 경우 기관 내 삽관, 심장마사지 등의 치료가 환자의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해하고 이러한 처치를 상기 환자에게 시행하지 않기를 동의한다"라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다.
"환자 스스로 서명 못할 상황 아냐, 딸에게 과도한 부담 지워"
인권위 장애인차별시정위원회는 "진정인이 응급 입원 및 보호 입원 등을 한 것으로 보아 자·타해 위험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의사 표현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정신적·신체적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심폐소생술 포기 여부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심신 상태는 아니었다"면서 "그런데도 진정인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보호 의무자나 법정대리인도 아닌 미성년 자녀에게 부친의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한 행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과 일반적 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인권위는 "당시 만 15세에 불과한 진정인의 딸에게 DNR 동의서를 작성하게 한 피진정인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면서 "피진정인은 응급의료법에 따라 입원 중인 환자가 응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적절한 응급의료가 가능한 의료기관으로 이송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임에도 미성년자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심정지나 호흡곤란이 발생할 경우 생명 연장 처치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서명하도록 했고, 아버지가 예기치 못하게 사망해도 A 병원에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동의서 내용은 미성년 자녀에게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게 한 것으로써 진정인과 미성년 자녀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인권위는 "A 병원장이 헌법과 정신건강복지법에서 정하고 있는 입원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닐 권리를 침해했고, 정신건강증진시설장으로서의 인권 보호 의무를 소홀히 했다"면서 "앞으로 입원환자가 의사결정 능력이 없거나 현저히 떨어지지 않은 이상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 징수 과정에서 정신질환자 등의 의견을 존중하고, 미성년자 자녀로부터 심폐소생술 포기 동의서를 받지 않도록 하는 등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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