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탄압 속에서도 독립군이 승리한 경우가 꽤 있어. 특히 3·1 운동 이후에 만주 지역에서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청산리 대첩은 독립 투쟁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어.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독립군이 일본의 정식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야기, 궁금하지 않니? 봉오동 전투 - 처음으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어3·1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의 독립군이 크게 늘어났다고 했지? 1920년대에는 만주 지역에만 450여 개의 무장 독립 단체가 만들어져서 일본의 군인이나 경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수도 많아지고 강해졌어. 또 각 지역의 독립군들은 서로 힘을 합쳐 국내로 들어오려는 작전을 시도했지. 봉오동 전투봉오동 전투 | 1920년 5월 북간도 지역의 여러 독립군 부대를 합쳐서 만든 ‘대한군 북로 독군부’는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에 일본군과 정식으로 전쟁을 치렀어. 우선 30명 규모의 자그마한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몰래 들어와 일본 헌병 순찰 부대를 무찌르고 무사히 돌아왔어. | | 독립군 부대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복수를 한답시며 1개 부대와 헌병 경찰 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공격해왔어. 하지만 독립군을 찾지 못하자 주변 마을에 살고 있는 죄 없는 조선족들을 무참히 죽이고 돌아가고 있었지. 이때 숨어있던 독립군이 나타나 무찔렀어. | | 이 소식에 화가 난 일본군은 독립군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많은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의 독립군을 공격했지. 일본 부대가 봉오동 입구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은 봉오골의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마을 주변 곳곳에 군사를 숨겨두었어. | | 일본 부대를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우리 부대는 깊숙한 곳에서 일본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다 3면에서 사격을 퍼부어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어. 일본군은 3시간 정도 전투를 벌이다 후퇴했지만, 이를 예상한 우리 군대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쫓아가 쳐부수었지. | 이 전투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패했으나,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었다고 해. 이것이 독립군 사상 첫 승리인 ‘봉오동 전투’야. 이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계속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병력 보강과 군비 확충에 힘을 쏟게 됐지. 청산리 대첩 - 일본군을 단단히 혼내주었어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보복을 위해 1920년 10월 엄청난 수의 부대를 이끌고 독립군을 모조리 무찌른다며 만주로 떠났어. 일본군의 의도를 일찌감치 알아챈 백야 김좌진 장군은 만주 지역의 독립군 부대들을 백두산 계곡 근처의 화룡현 청산리로 이동시켜 일단 싸움을 피했지. 그러나 일본군이 한국인 마을을 불사르고 동포들을 무참히 죽이는 것을 보고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어.
전투를 위해 모인 독립군의 총 병력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 군정서 병력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 독립군 등 2천 8백 명 정도였어. 독립군 부대로서는 최대 규모였지만 일본군에 비하면 1/20 수준이었지. 게다가 일본군은 철저하게 훈련받은 정식 부대였고, 우리는 주먹구구식으로 훈련된 민간인 부대였어. 청산리 대첩청산리 대첩 | 10월 21일, 수풀이 무성한 백운평 계곡에 매복해 있던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의 북로 군정서군은 계곡으로 들어서던 일본군 선발대를 코앞까지 유인해 200여 명을 사살함으로써 청산리 전투가 시작돼. | | 일본군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의 노인들에게 “독립군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사기가 떨어져 허둥지둥 도망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한 후, 나무와 바위 뒤에 숨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지. 200명의 일본군은 전투를 시작한지 20분 만에 모두 죽고 말았어. | | 뒤이어 도착한 본부대는 기관총을 엄청나게 쏘아댔지만 소용없었어. 일본군은 급히 새로 부대를 짜 숨어 있던 독립군의 옆구리를 공격하려 했지만, 절벽 위에서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립군에 의해 실패하고 말아. 결국 일본은 막대한 희생을 치른 채 도망갔어. 또 오후에는 홍범도 장군의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했어. |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 3,000여 명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어(1천 4백 명으로 보도한 신문도 있음).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 병사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지형을 적절히 이용한 지휘관들의 우수한 작전, 간도 지역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거둔 성과야. 더 알아보기 조선 왕이 돌아가셨다청산리 전투 이후 김좌진 장군은 임시 정부에도 참여할 수 있었으나, 독립군을 기르는 데만 전념했어. 러시아 자유시와 북간도를 오가며 군사 학교를 만들어 제대로 훈련된 군인을 기르려 애썼지. 군사력을 키우는 것만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1920년대 말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작전을 펴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공산주의자인 박상실에게 암살당해. 김좌진 장군의 사망 소식에 주변 지역 조선인들은 ‘조선 왕이 돌아가셨다.’며 슬퍼했다고 해. 그만큼 김좌진 장군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큰 희망이었던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