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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보존 참여호소
happykingdoom1004 2021-05-28     조회 : 922

선조들이 물려주신 훌륭한 유산이 있어도 자손들이 제대로 유지,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법이죠. 본존불상이 계속 훼손 되는 상황입니다. 서로 힘을 합쳐 열심히 복구해야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경주 석굴암 석굴

 ]

경주 석굴암 석굴 본존불

석굴암의 본존불. 높이 3.26m. 자연스럽게 표현한 간다라식의 어깨 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를 한 두 다리와 무릎,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손은 석가모니불을 표현하고 있지만, 근래들어 아미타불이란 설도 대두되고 있다.

이칭별칭경주 석굴암 석굴, 석불사, 조가절, 
유형유적
시대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사찰, 암자
건립시기·연도751년(경덕왕 10)
규모(면적)1기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로 873-243
소유자석굴암
관리자석굴암
문화재 지정번호국보 제24호
문화재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 국보.

개설

국보 제24호.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199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굴암의 창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일연()의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신문왕대()」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석굴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과 표훈()을 청하여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개(: 감실을 덮는 천장돌)를 만드는데 돌이 문득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에 분노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신앙의 소산이며, 치정자와 백성이 혼연일치된 민족정신의 응결체이다. 석굴암은 단지 김대성의 개인적인 발원()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기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의 발원이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오악()의 하나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으로 존숭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토함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을 이루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호국대룡()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운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석탈해()가 동해에 상륙하여 토함산정에 오른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곧 동해로부터 서라벌에 이르는 최단통로가 바로 토함산을 통과해야 하며, 또 이 동악의 준령이 신라건국 이래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주는 중요한 군사적인 요새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역사()였던 석탈해는 뒤에 동악의 산신이 되었고, 동해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신라의 국토방위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요충이었으며,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제일의 관문이었던 토함산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감은사()·무장사()·원원사() 등이 한 집안의 명복, 나아가서는 국가수호를 위한 이념으로 세워졌던 것처럼 불국사와 석불사도 역시 같은 뜻으로 창건되었던 것이다.

동악의 수호신이 된 석탈해, 그리고 동해의 호국대룡이 된 문무대왕, 이들 두 왕에 대한 숭앙의 정은 석굴암을 창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본 일이 없는 심정이었다.

둘째,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와 경덕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경덕왕대는 정치·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신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당시의 신라는 통일 초기의 수습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이러한 안정은 신라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평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문화는 국민총화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화엄()의 도리를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그 정신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게 하였다.

경덕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진리의 성자이고자 했고, 이러한 정치이념은 조형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다.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여 구축한 석굴암도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과 신심을 지닌 경덕왕의 뜻에 크게 힘입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라기보다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 국민의 염원이었고,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 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석굴암의 역사

석굴암 변천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속하는 자료들 뿐이다.『불국사고금창기 ()』와 정시한()의 「산중일기()」가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에 속한다.

『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종열()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또 굴 앞의 돌계단〔〕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 대겸()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수한 규모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한,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중수한 사실과는 직접 관계가 없으나, 기록할 당시의 석굴암의 현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어 석굴암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88년 5월 15일에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입구의 홍예(:무지개 모양의 문), 본존상()과 좌대석(), 주벽(:가장자리의 벽)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석굴의 보존상황이 온전했음을 여실히 입증하는 중요한 문구이다.

또한, 「산중일기」를 통해서 볼 때 석굴암이 불국사와 골굴암()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일종의 순례관광()코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산중일기」의 작자 이외에도 많은 승려·시인·신도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겨주고 있다.

영조 때 남경희()는 「우중숙석굴(宿)」과 〈석굴()」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시기의 이관오()는 「석굴암」을, 최천익()은 「유석굴증등여상인()」이라는 한시를 읊어 당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나타낸 바 있었다.

석굴암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근세의 민속화가인 정선()은 1733년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 2권 가운데에 경주의 골굴과 석굴을 그려 넣었다. 이 화첩은 전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실 입구에 목조전실을 첨가하는 데 귀중한 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200∼300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 유지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와서 석굴암은 울산병사 조예상()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대수리 때에 석굴암 부근의 노인들은 이 석굴을 가리켜 ‘조가절()’이라 지칭하였고, 그들의 어린 시절에는 향화()와 공양()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 바도 있다. 일본인들이 우편배달부에 의하여 굴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무관한 것이다.

1907년경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일본인에게 석실이 있음을 알렸고, 그 말에 따라 발견했다고 전하여, 마치 석굴을 지하동굴에서 처음 발굴한 듯 과장하여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오히려 토함산에서 석불이 발견되었다는 극적인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 뒤 일본인 무뢰한들이 수많은 탑상()들을 반출해 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적지 않은 파손행위까지 따르게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소규모적인 반출 및 탈취는 일제에 의하여 석굴 전체의 해체, 운반이라는 계획까지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이미 그들의 소유가 되자, 그들은 굳이 석굴을 해체하여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또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1912년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가 이곳을 방문한 뒤, 총독부는 석굴암 중수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시기의 중수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제1차는 1913∼1915년, 제2차는 1917년, 제3차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차중수는 거의 완전 해체하는 복원공사였다. 이 때 직접적인 공사에 앞서 기초조사가 있었는데, 이 조사는 당시 석굴암의 퇴락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12년 6월 25일자의 현장조사복명서에 의하면, 석굴암은 황폐화되어 절박한 상황에 있다고 보고되었다. 즉,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구멍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본존불상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1913년 10월에 착공된 1차중수는 그 1차연도에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 본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3차연도인 1915년 5월에 최종공정인 석굴재조립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당시 그들은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등장한 시멘트의 효능을 믿고 이 석조물 조립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의 커다란 문제거리를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석조물에 시멘트를 부가함으로써 석조물을 약화시켰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콘크리트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완벽한 정리를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의 교정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간 소요된 공사비는 1만 2,724원 54전이었다고 한다.

1차중수의 결점은 준공 후 2년이 못되어 굴 내의 누수현상으로 나타났다. 누수의 양이 점차로 많아져 1917년 7월에 그 방지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2차중수이다.

6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진행된 이 공사는 콘크리트로 된 돔(dome) 표면에 석회 모르타르와 점토층()을 마련하고, 이 원형돔의 외부에 방사선상의 암하수()를 설치한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까는 것이었다. 1917년 6월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는 굴 상부 봉토면()에 대한 응급조처에 그쳐 누수·오탁()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없었으므로, 그 뒤 3년 만에 다시 대규모의 중수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차중수는 최초의 중수과정에서 미술품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옛 주위의 경관을 파괴했다는 점 때문에 시행되었다. 굴 입구의 석축 및 홍예(: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놓은 석축은 마치 터널과 같이 보인 점이 미술부문의 전문가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2차중수에도 불구하고 누수 및 침수의 현상이 계속되었으며, 굴 내에는 많은 습기가 차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적인 결점들로 인해 다시 수리를 행해야만 했다. 따라서 3차중수는 석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조건도 전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3일 기공하여 1923년까지 4년간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공사비 1만 6,985원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중수 이후에도 결로()·침수의 현상은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보수가 항시 뒤따랐다. 또한 1차공사에서 잘못 배치된 상()들과 굴의 구조도 그대로 묵과된 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못하였다.

8·15광복 후 석굴암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일본인들의 중수에서 빚어진 모순과 그로 인하여 발생된 가속적인 퇴락은 더욱 심해져 갔다.

1961년에 들어서 각계각층의 깊은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석굴암에 대한 조사, 예비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사의 목적은 주로 석굴을 계속 퇴락시키고 있는 기상·누수 등의 자연현상과 불상면의 심한 풍화작용에 대한 조사와 일제시대에 잘못된 판단에서 재조직된 굴 자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배정에 대한 검토에 있었다.

여러 가지 측면의 조사와 연구에 이어서 석굴암의 전면적인 중수가 시작되었다. 침수·결로 등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굴 내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고, 그에 따라 굴을 외기와 차단시키고, 인위적으로 석굴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목조와즙(: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의 전실을 설치하여 외부의 변화 및 영향을 배제시켰고, 지하수를 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배수구를 설치하였으며, 콘크리트로 덮은 돔을 따라 흐르는 물도 역시 이 배수구를 통하여 처리하였다.

이 밖에도 석굴에 영향을 주는 자연조건을 일일이 제거하고, 일본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수정하였다. 굴 내 조각의 위치에 관하여는 팔부신중(:불교를 보호하는 8가지의 신장) 가운데 가장 앞면에 있던 좌우 각 일상()이 금강역사()와 마주서게 굴곡지어 배치되었던 것을 다른 신중상과 일직선으로 병렬시켰다.

또한, 이때에 수광전(殿)·3층석탑·요사 등의 부속건물과 유적 등도 보수하였다. 이 복원작업은 1962∼1964년까지 3년이 소요되었다.

석굴암 석실의 구조

먼저 전실에 들어서면 비도()의 정면에서 본존불을 볼 수 있다. 전실은 너비가 약 3.5칸이고, 길이가 약 2칸 정도 된다. 좌우의 석벽에는 4체()씩의 팔부신중이 각각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전면 좌우 석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2체의 금강역사가 서 있어 항상 비도를 지키고 있다.

이 전실의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여러 가지 이설이 있어서, 아직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을 짓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전실에서부터 몇 걸음 나아가 좌우의 금강역사를 보면서 비도에 들어가면 약 2칸의 넓이에 길이가 1.5칸인 공간이 있다. 이 비도의 양측에는 좌우 2체씩 4체의 사천왕()이 조각되어 있다.

상부는 아치형으로 덮여 있으므로 원래 전실에 목조건축이 없었을 당시에는 바로 여기서부터 석굴의 내부로 들어간다는 인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석굴의 입구에는 좌우 2기의 석주()가 있다. 한 변이 8촌인 팔각형 연좌() 위에 서 있고, 중앙에도 연판()의 장식이 가해져 있다. 이 석주는 비도와 굴을 구분짓는 경계의 뜻으로 건립되었다.

굴의 평면은 원형이고 좌우의 지름은 6.8m, 앞뒤의 지름은 약간 좁아서 6.58m이다. 중앙에서 가볍게 뒤로 처진 곳에 높이 약 1.6m, 지름 약 3.7m의 석련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 약 2.72m의 그 숭고한 모습에는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굴의 주위에는 10개의 요석(: 굴의 벽을 이루는 돌)이 놓여 있다.

요석의 높이는 약 0.2m, 너비 1.8m, 그 위에 다시 높이 약 2.42m, 넓이 약 1.21㎡의 화강암 15면을 병렬시켜 석벽으로 삼고, 각 면에 엷은 부조()의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 바로 뒤 중앙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로 각각 5체씩 합하여 10체의 십대제자입상()이 조각되었고, 다시 그 좌우로 각각 2체씩의 천() 또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상이 새겨진 돌 위에 다시 긴 이마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또 한 층의 새로운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본존불의 바로 뒤 십일면관음의 위쪽으로는 복선단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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