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바야흐로, 고3 여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야간자율학습이 일찍 끝나 9시에 교문을 빠져나와
당시에 좋아하던 가수의 CD를 사기위해 레코드 가게를 들렀습니다.
한참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10시,
집에 가야 겠다는 생각에 친구와 레코드 가게를 나섰습니다.
당시, 친구집과 우리집은 공원 하나를 끼고 맞은편에 자리잡혀 있었는데
공원을 돌아서 골목으로 들어가야 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워낙 겁이 많아, 공포영화의 '공'자도 모르는 애였는데,
그래서 귀신따위 와도 콧방귀하나 뀌지 않은 대담한 간을 가진 여자였기에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 주고 5분 남짓한 비오는 밤길을 분홍색 귀여운 토끼 우산을 쓴채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횡단보도 하나만 지나고 골목 하나만 지나면 집이였고
그 어둑한 골목을 지나기 바로 전엔 슈퍼 한개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겁먹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였기에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 따윈 전혀 없었습니다.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데 신호없는 횡단보도인데다 밤이여서 그런지
차들이 쌩쌩 잘도 지나가더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지나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얼핏 내 옆쪽으로 왠 남자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섬뜩한 시선을 느꼈지만,
에이 - 아니겠지. 그리고 아직 주변 상가도 밝은데 무슨 -
전혀 긴장없는 상태로 완전 무방비한 상태로 뚜벅뚜벅 집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골목을 막 들어서니, 저쪽에 환하게 불 켜진 슈퍼가 막 눈에 들어오는데
왠지 뒷쪽이 너무 섬짓하여 고개를 휙 꺾어 뒤를 보고 싶었지만
그 사람의 직감 .. 이랄까, 왠지 뒤를 보면 안될거 같은 기분.
그래서 슬며시 바닥을 탁 보았는데 ... 아무 그림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하고 뒤를 휙 보았는데 .. 역시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나의 착각인가부다 .. 하고 슈퍼를 낀 모퉁이만 돌면 집 대문인데,
그날따라 슈퍼를 들르고 싶었는데
살빼야해, 먹을건 안돼란 투철한 다이어트 정신은 왜 하필 그때 발동한 것인지.
막 모퉁이를 돈 순간,
순식간에 내 고막을 뚫는 엄청난 발달음질.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앗, 하는 찰나에 뒤에서 갑자기 덮쳐오는 그놈의 목소리.
"소리지르면 죽여버릴거야."
하면서 나를 바닥으로 확 밀쳤습니다.
그순간 가방에 있던 좋아하는 가수의 막 발매한 따끈따끈한 2집 CD가
둔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그당시에 빠순이인걸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CD가 부서짐과 동시에 제 이성의 끈도 끊어졌습니다.
"야이!! 개XX아!!!!!" 하면서 벌떡 일어나 메고 있던 가방으로 그놈을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놈도 적지아니 당황했는지 한참 멍하게 있다 갑자기
"이년이!!!!!!!!!!!!!!!" 하면서 저를 꽉 붙들었습니다.
"악!!!! 동네 사람들!!!!!! 사람살려!!!!!! 살려주세요!!!!!!"
제 19년 인생에 그렇게 크게 소리 질러 본적은
아마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을정도로 골목안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적막한 골목은
그 동네에 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들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골목에 있던 불빛마저 까맣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순간, 내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죽겠구나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진짜 온힘을 다해 그남자의 팔을 풀었습니다.
그남자도 내 힘에 또 당황했는지 다리로 나를 막 걷어찼습니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고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고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계단,
저 계단만 오르면 집앞 현관입니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대답이 없고
그래, 살려면 뛰자.
한참 실갱이를 벌이던 찰나,
그놈과 나와의 거리가 잠깐 벌어진 틈을 타 잽싸게 계단을 뛰어 올랐습니다.
두계단씩, 내 생에 처음으로 열심히 100M를 10초로 완주할 정도의 힘으로!!!
그놈은 쫓아오려다 나와 실갱이가 힘들던지
모를 갖은 욕들을 나에게 퍼부으며 사라졌습니다.
현관에 들어서자, 다리에 힘이 풀리고 풀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그순간, 슬며시 현관이 열리더니, 엄마가 놀란눈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무슨일이냐며 나를 다그치며 묻더니,
혹시 소리 지른게 너였냐며, 엄마는 그냥 주변에서 싸우는 줄 알고 들여다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괜찮다고 그냥 놀라서 그런거라고 씩씩하게 다시 걸음을 집안으로 옮기고는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했더니,
남동생도 같이 와줘서 신고를 도와줬습니다.
별다른 피해는 없어서 신고 접수만 되고
범인은 잡지 못한채 집으로 돌아와야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정신 없던 시간이어서
그렇게 또렷하게 그놈을 봤건만 그놈 얼굴이 전혀 기억이 나질않아
그놈을 잡을 어떤 단서도 내놓을수 없던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 날 이후,
저는 10시 이후로는 밖을 나가지 않습니다.
귀가는 보통 늦어도 9시까진 집에 돌아옵니다.
그날 저희 어머니께서도 살려달란 여자의 목소리를 그냥 지나쳤듯이,
보통 사람들이 거의 다 이런 소리에 무관심합니다.
다음날 아랫집에 살던 부부도
제 목소리를 코앞에서 들었지만 혹시 칼부림에 피해를 당할까
안타깝지만 지나쳤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우리오빠는 집밖에서 혹시라도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리면
얼른 달려나갑니다.
저처럼 혹시 피해를 당할까 도와주는 마음이 앞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일이 없었더라면 저희 집도 이런 일에 나서는 일은 없었겠지요.
저는 허벅지에 멍이 들고 볼주변에 멍이 들고
어깨와 무릎에 피가 나는 정도로 끝났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밝아져서
여자들이 편하게 살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갈수록 늘어가는 범죄율때문에
여자들은 더더욱 외출하기 힘들어지는 나라가 원망스럽습니다.
다들 여자들의 도움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물론, 도움을 받은 여자분들은
혹시 도와주시 분이 피해를 입지 않게
후에 있을 경찰 조사시등에 잘 협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