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쓴다, 삶의 궤적을!
-한겨례21 발췌
-평범한 사람들의 자서전 출간 유행…
미시의 역사를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아
일산에 사는 주부 신임재(55)씨는 집안 정리가 끝나는 오후가 되면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다. 책상이라야 밥상에 흰 수건을 깔아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이지만 신씨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집필실이다. 오늘의 주제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들의 방’이라는 작은 제목을 쓰고 나니, 여러 가지 기억들이 필름끊긴 영화처럼 툭툭 끊어져 떠오른다. 아장거리며 품에 달려들던 아들에게서 나던 달콤한 우유냄새, 고등학생 때 절뚝거리며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의 다리에서 본 시퍼런 피멍과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 앞에서 산산조각을 낸 워크맨의 파편들. 이웃집에 강도가 들었다며 재수생이었던 아들을 불심검문하던 경찰 앞에서 “내 아들이 강도처럼 보이냐?”며 동네 사람이 모이는 줄도 모르고 눈물범벅되어 소리지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를 즈음 어느새 눈가가 축축해진다. 정작 글이 진도나가는 시간보다는 혼자서 빙그레 웃다가 울기도 하는 시간이 훨씬 길지만 이렇게 습관처럼 글을 써내려간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그 사이, 엄마 손을 잡고 쑥을 캐러다니던 어린 산골 아이가 장성한 아들을 장가보내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기까지 넘었던 삶의 고개들로 채워진 노트가 100쪽을 넘었다.
“나이 먹으면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언젠가 내 손으로 태워버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식들에게는 별로 의미도 없어보이는 것들이 이사다닐 때마다 짐만 될 것 같아서요. 그런데 내 흔적을 막상 없앤다고 생각하니 ‘내가 어떻게 살았나, 나는 뭐였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어떻게 살았나, 나는 뭐였나’
마침 그때 민예총 문예아카데미에서 하는 ‘자아발견을 위한 자서전쓰기’라는 강좌의 광고를 신문에서 발견했다. “유명인들이나 쓰는” 자서전을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자신이 쓴다는 게 우스웠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는 광고문구에 솔깃해, 문화센터 한번 다녀본 적 없는 신씨였지만 덜컥 등록하고 말았다. 교실에는 사업가와 교사에서, 30대 주부까지 다양한, 그렇지만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숙제로 내준 종이 한장 채울 내용이 떠오르지 않아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떠오른 기억은 다른 사건과 잊혀졌던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강좌는 3개월로 끝났지만 신씨는 두뇌의 창고에서 꺼내온 삶의 조각들을 계속 이어붙였다. 그러다 때로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과도 만났다. 고3 시절, 자신의 욕심으로 가장 친했던 친구와 오해가 생기면서 학급동료들로부터 “나쁜 년” 소리 들으면서 겪었던 지독한 외로움이나, 대학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한 아들과 겪었던 험악한 갈등과 단절은 그저 가슴에만 묻어두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자식교육에도 실패했고, 사회활동에도 낙오한 인생이지요. 그러나 정리를 하고 보니 고통스러웠던 시절도 제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자서전 쓴다는 얘기를 듣고 ‘왜 멀쩡한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려고 하느냐’던 남편도 요즘에는 가끔 이 얘기 한번 써보라고 옛날 기억을 환기시켜 주곤 합니다.”
아쉬웠던 나날, 그래도 스스로를 만들었다
자서전은 ‘자기가 쓰는 자기의 전기’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오랫동안 성공담이나 위인전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그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고 있다. 업적 나열이나 입지전적 성공담 대신 진솔한 자기고백과 성찰이라는 자서전의 중요한 덕목을 지닌 평범한 사람들의 기록이 소리없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천의 자동차 조립공장에서 일하는 이근제(45)씨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살아왔나,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좀더 잘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어 내가 살아온 길을 되짚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이씨는 글이라고는 써본 적이 없었지만 지난해 여름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배워 보름 만에 자신의 사십평생을 25장의 프린트 용지로 뽑았다. “아쉬움이 많은 만큼 저도 모르게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던 모양입니다.” 문장이나 단어에 틀린 것이 많을 것같아서 평소 알고 지내던 월간 <작은책>의 편집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덜컥 연재 제안을 받았다. 두달 정도 문장을 다듬은 이씨의 글은 노동자들의 생활글을 주로 싣는 <작은책>에 지난해 11월부터 13회분으로 나누어 연재되고 있다.
“(중략)아버지는 학교도 다니지 말라며 가방을 다 찢어버리고, 나를 때리기 시작하셨다. 나는 도망도 가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새로 가방을 사주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나는 부모님이 때리면 도망도 가지 않고 그대로 맞는다. 그래서 부모님은 때리고 나서 더 마음아파하신다. 도망가면 덜 맞을 텐데 하시며….”(이근제 <바보처럼 살아온 날들>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