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은 장시간의 비행기 여행 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자신에 대한 모든 정체성의 기억들을 상실해 공항 안을 서성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이름만은 기억해주었다니. 주원은 정환에게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섰다. 정환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서윤은 주원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보았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주원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슬픔이 가득 해 메마름에 젖어 있었던 그녀가 되찾은 것이다. 감정을, 그리고 삶을. 주원은 정환의 옆에 앉아 눈가에 맺힌 방울들을 닦아 내었다. 정환이 겪고 있는 해리성 둔주, 그것은 우리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겪어야 했던 병이다. 목적이 있기에 용기 내어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마저 망각하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40주라는 여행기간이 너무나도 길었던 탓일까. 오히려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느라 긴 인생을 보내기도 한다. 마치 정환은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에게 현실은 각박하고 차가워 보일 터. 주원은 가슴 한 구석이 저려왔다. “나는 누구죠?” 네 이름도, 네가 이루어놓은 그 어떤 것도 네 자신을 말해주지 않아. 아무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만큼 특별하기도 해. 무엇도 네 자신을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출 순 없으니까. “넌, 나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정환의 차가운 손에 주원의 따뜻한 손이 얹어졌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만으로도 살아볼 가치가 있는 걸까. 우리가 누군가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이유도 그래서일까. 소중해지기 위해, 또 살기 위해? 멀게만 느껴졌던 세계가 피부에 스며들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느낌, 숨 쉬고 있는 느낌, 그리고 온몸의 세포가 생동하는 느낌. 이것은 주원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가져다주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행복감. 이 순간을 위해 그 머나먼 길을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또 이제는 이 길을 그만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원은 눈을 감고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셨다. 신선하고 상쾌한 기운이 몸 깊숙이 여기저기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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