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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happykingdoom1004 | 2020.05.01 | 조회 580 | 추천 1 댓글 3

비행기

진정한 비행시대를 연 라이트 형제

요약 18세기 후반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유인비행을 실시했지만, 진정한 비행시대를 연 공로는 라이트 형제에게 주어진다.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사업에서 거둔 수익으로 비행기에 도전했다. 드디어 1903년 12월 17일, 라이트 형제는 플라이어 1호로 하늘을 나는 데 성공했다. 형제는 1909년에 라이트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비행기 사업을 전개했다.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896년 8월 9일, 독일의 항공기술자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은 자신이 만든 글라이더를 타고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행 도중에 갑자기 강한 바람을 만나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나타나리라고 믿는다. 이제까지의 나의 노력과 연구가 결코 헛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는다.”

이에 감동을 받고 비행기에 도전한 용감한 형제가 있었으니, 그들은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와 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였다.

비행기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는 라이트 형제

비행기의 아버지로 평가되고 있는 라이트 형제왼쪽이 동생인 오빌이고, 오른쪽이 형인 윌버이다.

최초의 비행을 찾아서

라이트 형제 이전에도 유인비행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 왔다. 역사상 최초의 유인비행은 1783년 프랑스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에 사용된 비행기구는 몽골피에 형제(Montgolfier brothers)가 제작한 열기구(hot air balloon)였다. 이어 1852년에는 프랑스의 지파르(Henri Giffard)가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구를 통해 역사상 최초의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지파르의 경우처럼 엔진을 활용한 기구는 비행선(airship)으로 불리는데, 비행선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는 독일의 체펠린(Ferdinand von Zeppelin)을 들 수 있다. 체펠린은 1901년에 바람을 거슬러 이동하는 최초의 비행선을 선보였고, 그것은 사람의 여행은 물론 폭탄의 수송에도 사용되었다.

이에 앞선 1890년에 프랑스의 아델(Clément Ader)은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비행기계인 에올(Éole)로 하늘을 날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시적 도약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파르와 체펠린의 비행이 공기보다 ‘가벼운’ 장치를 활용했다면, 아델의 비행은 공기보다 ‘무거운’ 동력비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아델은 1897년에 보다 성능이 개선된 아비온(Avion)을 개발하기도 했으며, 지금도 프랑스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 대신에 아델을 ‘비행기의 아버지’로 받들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한 독일의 릴리엔탈은 1894년에 글라이더(glider)를 활용한 비행에 성공했는데, 그것은 공기보다 무거운 ‘무동력’ 비행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아델의 에올에 대한 특허 도면(1890년)

아델의 에올에 대한 특허 도면(1890년)

그렇다면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1903년에 있었던 라이트 형제의 비행도 아델의 비행과 마찬가지로 공기보다 무거운 동력비행이었다. 다만 아델은 증기기관을, 라이트 형제는 가솔린기관을 사용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라이트 형제의 경우에는 비행사가 지속적으로 비행을 조정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유인비행, 동력비행,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체, 지속적 비행 조정 등과 같이 오늘날의 비행과 동등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행기에 대한 기록이 있다. 16세기에 정평구()가 발명한 비거()가 그것이다. 정평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비거를 사용해 외부와 연락을 하는 한편, 고립된 성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거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또한 중국 진()나라의 장화()가 쓴 ≪박물지()≫에도 비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비거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전거에서 비행기로

윌버는 1867년에, 오빌은 1871년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모두 독신으로 살았으며, 평생 동안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냈다. 라이트 가족은 1884년부터 데이턴에 정착했다. 윌버와 오빌은 모두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학업을 중단했다. 형제가 처음 선택한 일은 인쇄 사업이었다. 그들은 기계 폐품을 모아 활자 인쇄기를 만든 후 교회에 필요한 인쇄물을 제작하여 공급했다. 1889년 3월에는 ≪웨스트사이드 뉴스≫라는 주간 신문을 발간했으며, 그것이 좋은 반응을 얻자 다음해 4월에는 신문을 일간으로 바꾸었다.

1892년 12월에 형제는 라이트 자전거 가게(Wright Cycle Exchange)를 차렸다. 친구가 타고 다니다가 고장 난 자전거를 분해하고 부속품을 갈아 깨끗이 수리해 준 것이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각 지역별로 자전거 경주 대회가 열릴 정도로 자전거에 대한 열풍이 대단했다. 오빌은 자신이 만든 자전거로 경주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계기로 라이트 형제의 가게는 급속히 번창하기 시작했다.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에 대한 광고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에 대한 광고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사업에서 거둔 수익으로 릴리엔탈의 뒤를 이어 하늘을 나는 기계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라이트 형제는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와 함께 그들은 비행과 관련된 문헌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거기에는 릴리엔탈의 ≪항공의 기초로서의 새의 비행≫, 샤누트(Octave Chanute)의 ≪비행기계 발전의 현황≫, 랭글리(Samuel P. Langley)의 ≪항공역학 실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샤누트는 라이트 형제에게 비행기술에 대한 자문을 제공했으며, 라이트 형제가 성공한 이후에도 대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직 우리의 연구만을 믿는다.”

1900년 9월에 라이트 형제는 본격적인 비행실험을 위해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키티호크로 갔다. 처음에 형제는 쌍날개가 달린 글라이더를 제작하여 실험을 했는데, 1호기(1900 글라이더)의 비행거리는 30m밖에 되지 않았고, 2호기(1901 글라이더)의 경우에도 180m에 불과했다. 결국 라이트 형제는 비행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오빌의 회고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오직 우리의 연구만을 바탕으로 하기로 결심했다.”

라이트 형제의 풍동에 관한 복제품으로 버지니아 항공우주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라이트 형제의 풍동에 관한 복제품으로 버지니아 항공우주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라이트 형제는 1901년 10월에 약 2m의 풍동(wind tunnel)을 만들어 200여 개의 날개 모형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수행했다. 풍동은 자전거 부품들과 철 조각들로 만들어져 볼품없어 보였지만, 비행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라이트 형제의 발명품이었다. 그들은 풍동 장치를 통해 날개가 받는 양력(lift force)과 항력(drag force)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었고, 길고 폭이 좁은 날개가 항공학적으로 효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3호기(1902 글라이더)는 대성공이었다.

라이트 형제의 최대 경쟁자는 랭글리였다. 랭글리는 펜실베이니아 웨스턴 대학(현재의 피츠버그 대학)의 교수를 거쳐 스미소니언 협회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던 유명한 과학자였다. 그는 ‘그레이트 에어드롬(Great Aerodrome)’이라는 비행기를 만든 후, 1903년 10월 7일과 12월 8일에 공개적인 비행실험을 했다. 그의 비행실험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라이트 형제에게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랭글리가 제작한 에어드롬으로 피츠버그 대학에 전시되어 있다.

랭글리가 제작한 에어드롬으로 피츠버그 대학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상 공식적 지식의 측면에서는 라이트 형제보다 랭글리가 뛰어났다. 그렇다면 왜 랭글리는 실패했는가? 랭글리는 모형 비행기를 제작한 후 그것을 그대로 확장하여 실물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에게는 비행기를 실제로 조정하는 일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라이트 형제는 모형 비행기가 아니라 실물의 글라이더에서 출발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비행기인가, 거짓말쟁이인가

드디어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에서 라이트 플라이어(Wright Flyer) 1호가 하늘을 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비행사는 동생인 오빌, 비행시간은 12초, 날아간 거리는 36.5m로 기록되었다. 역사에 남는 최초의 비행사를 정하기 위해 동전을 던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오빌의 첫째 비행에 이어 윌버, 오빌, 윌버의 순으로 추가적인 비행이 실시되었다. 네 번째 비행에서 체공시간은 59초였고, 비행거리는 259m를 기록했다.

1903년 12월 17일에 있었던 플라이어 1호의 첫비행 장면

1903년 12월 17일에 있었던 플라이어 1호의 첫비행 장면오빌이 비행기를 조정하고 있고, 윌버는 날개 끝에서 달려가고 있다.

라이트 형제는 플라이어 1호의 문제점을 분석한 후 1904년에 플라이어 2호를 만들었다. 플라이어 2호의 경우에는 상체를 일으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도록 했으며, 비행기에 바퀴를 달아 어디에서나 날 수 있도록 했다. 1905년에는 플라이어 3호가 제작되었다. 이 때 라이트 형제는 날개 비틀기를 방향키와 분리하여 따로 작동하도록 조치했다. 형제는 플라이어 3호로 선회 비행과 8자 비행에도 성공했다.

1908년 5월에 윌버는 플라이어 3호를 배에 싣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불행하게도 여행 중에 비행기의 일부가 파손되는 바람에 그것을 수리하는 데 몇 주일이 걸렸다. 그러자 프랑스의 언론들은 <비행기인가 거짓말쟁이인가?(Flyer or Liar?)>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면서 라이트 형제를 허풍쟁이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플라이어 3호는 8월 8일에 르망 근처의 경마장에서 하늘을 멋지게 날았으며, 이를 지켜본 프랑스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1908년 9월 17일에는 워싱턴 시 외곽의 포트 마이어에 1천 명에 달하는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라이트 형제는 1년 전에 미국 국방부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그것이 적절히 달성되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시범비행이 있었던 것이다. 오빌과 육군 중위 셀프리지(Thomas E. Selfridge)가 동승한 모델 A는 계약에 명시된 기준을 넘어서는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파손되는 바람에 셀프리지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에 의한 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방부는 비행기를 군사 무기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비행을 기다리며

형제는 본격적인 비행기 사업을 위하여 1909년 11월 22일에 라이트 회사(Wright Company)를 설립했다. 윌버가 사장, 오빌이 부사장이었다. 라이트 회사는 기존의 모델을 더욱 개선한 모델 B를 선보였고, 1910년 11월 7일에 모델 B는 역사상 최초로 상업적인 항공화물을 운송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 라이트 회사의 비행기 제조공장은 미국을 넘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서 잇달아 설립되었다.

1910년경에 제작된 라이트 엔진으로 뉴잉글랜드 항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10년경에 제작된 라이트 엔진으로 뉴잉글랜드 항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 무렵에 라이트 형제의 특허를 침해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형제가 가장 치열하게 특허 분쟁을 벌인 상대는 커티스(Glenn H. Curtiss)였다. 모터사이클 선수로 명성을 날렸던 커티스는 벨(Alexander G. Bell)이 결성한 항공협회(Aeronautic Society)를 매개로 비행기를 개발하는 데 몰두했다. 1908년에 커티스가 비행 실험에 성공하자 라이트 형제는 특허료를 지불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커티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이 제작한 비행기를 항공협회에 판매했다.

이에 라이트 형제는 커티스에 대해 특허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5년 동안의 긴 공방이 있은 후 1913년에 라이트 형제는 커티스에게 승소했다. 그러나 커티스는 판정에 불복하면서 항소를 제기했다. 두 진영의 특허분쟁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1917년에 미국 정부의 중재로 상호 특허사용 협정이 체결되면서 마무리되었다. 1929년에 라이트 형제와 커티스의 두 회사가 합병되어 커티스-라이트 회사(Curtiss-Wright Corporation)로 탄생했다는 점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행기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는 프로펠러와 동력장치를 앞에 달고 꼬리날개를 뒤에 다는 비행기가 보편화되었다. 1927년에는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는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비행에 대한 열기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제트 엔진과 로켓 엔진을 비롯한 고속 엔진의 개발이 추진되었고, 이후에 제트 엔진은 장거리 공중운송수단에, 로켓 엔진은 미사일이나 인공위성의 발사체로 사용되었다.

한번은 오빌이 기자들로부터 “비행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언제 가장 큰 흥분을 느꼈냐?”는 질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상 최초의 비행에서 기체가 이륙하던 순간이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오빌은 예상을 깨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비행을 하지 않을 때 더 전율을 느꼈습니다. 무슨 얘기냐고요? 비행 전날 침대에 드러누워 다음 날 비행이 얼마나 짜릿할지를 생각해 볼 때가 가장 흥분되었으니까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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