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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 ||||||||||||||
홍범도 장군 happykingdoom1004 | 2020.06.07 | 조회 493 | 추천 1 댓글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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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대한독립군 사령관 [ 洪範圖 ] 홍범도(洪範圖, 1868. 8. 27∼1943. 10. 25) 선생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선생은 매우 어렵게 성장하였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여 동네 부인네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고, 또 9살 되던 해에는 부친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생은 작은 아버지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지내다가 어느 부잣집의 머슴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게 되었다. 3년여 간의 병영생활은 선생에게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체험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부정과 비리를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생은 날로 심해가는 군교들의 부정부패와 사병들에 대한 학대를 보다 못해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하고 말았다. 평양성을 빠져 나온 선생은 황해도 수안군 총령(悤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3년간 일하기도 하였고, 또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로부터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비롯하여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듣게 되었다. 이 같은 경험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침략하는 일제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선생의 반일의식을 더욱 증폭시켜 갔다. 1895년, 선생은 파계한 뒤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 먹패장골이라는 곳에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로 사냥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즈음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 자국 상인과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더니, 그 해 6월 21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동시에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청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우리 민중의 자주적 근대화 운동이요, 방일 민족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을 탄압하였다. 더구나 1895년 8월 일제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양력 사용을 강용하고, 단발령을 강제 실시하는 등 우리나라의 주권을 제약하여 갔다. 이와 같은 상황이 도래함에 따라 각지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讐)와 축멸왜이(逐滅倭夷)를 위한 의병 봉기가 이루어졌다. 선생 또한 1895년 11월 강원도 회양에서 김수협과 의기상통하여 봉기한 뒤, 경기, 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소총과 탄약 등 전리품을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이동한 뒤, 여기에서 12명의 동지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안변의 석왕사에 주둔하면서 1896년 8월 북천지계(北遷之計)에 따라 북상하던 유인석의병부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세 번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서 김수협은 전사하고 나머지 의병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선생 혼자 남게 되었다. 때문에 이후 선생은 1897년까지 평남과 함남, 그리고 황해도 접경지역에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친일 관리와 부호들을 응징하는 등 단독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함남 북청에 정착하여 1907년 후반까지 북청군 안산사 노은리에 거주하며 사냥과 농사에 종사하였다. 특히 이 때 선생은 안산사 일대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연대(捕捐隊)의 대장으로서 포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포연대를 주축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포수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한편 망국적 상황에서 포수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1907년 9월 3일 제정 공포된 ‘총포 및 화약류 취체법’의 강제 시행이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기와 탄약 및 무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정부와 관청에서 거두어들이고, 그 위반자를 처벌하도록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은 일제가 이 시기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의병전쟁을 봉쇄하고 탄압할 목적으로 강행한 것이었지만, 총으로 수렵하여 먹고 살던 산포수들에게는 매우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산포수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해 민족적 분노와 더불어 생활상의 위협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자 선생은 일제 침략자를 쳐부수고 자기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궐기하자고 포수들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1월 15일 선생과 차도선은 북청의 안산사와 안평사 포수들의 동업조직인 포계를 주축으로, 화전 농민과 광산노동자, 그리고 북청 진위대의 해산군인 등 70여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하여 봉기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선생과 차도선의 지휘 아래 봉기 직후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 관리인 안평면장을 처단하면서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달 22일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을 후치령에서 습격하여 적군 2명과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에도 이곳에서 미야베(宮部) 대위가 지휘하는 일본인 군경 70여 명과 3시간 동안 격전을 벌여 적군 3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8년 11월 선생이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1차 망명하기까지 수십 차례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삼수성과 갑산읍을 탈환하기도 하고, 헌병분견소, 순사주재소, 우체국, 일본군 관사 등을 습격 소각하기도 하고, 일진회 회원, 친일 관리와 부호, 일본인 군관민 등을 응징 처단하기도 하고, 일본인 금광을 습격하여 금괴를 빼앗아 군자금으로 이용하는 등 실로 대담무쌍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날으는 홍범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 1908년 11월 만주를 거쳐 노령 연해주로 망명한 이후에도 선생은 의병활동의 재기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선생은 연추에서 이범윤을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유인석과 항일투쟁의 방략을 논의하기도 하면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추풍에서 최원세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10년 4월 초순 선생은 러시아에서 구입한 총기로 무장한 30여 명의 의병부대원들과 함께 추풍을 출발하여 국내로 진격하였다. 그 해 4월 중순 간도를 거쳐 함북 무산에 진입한 선생의 의병부대는 5월 초순까지 무산과 종성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수 차례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처음 의병전쟁에 참가한 병사들이 많았고, 병력 또한 적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 해 5월 중순 다시 만주의 안도현과 길림을 거쳐 러시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재차 노력 연해주로 망명한 선생은 유인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13도의군은 의병 지도자들이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 작전과 지휘를 단일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1910년 6월 결성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실제 전투력을 지녔던 창의군과 장의군 두 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범윤이 창의군총재, 경성의병 출신의 이남기가 장의군총재로 각기 선임되어 도총재 유인석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이상설은 외교통신원으로 13도의군의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다. 선생은 이진룡, 이갑 등과 함께 동의원(同義員)으로 선임되었다. 선생과 이진룡 등은 의병장 출신인데 비해, 신민회의 핵심인물들이었던 안창호와 이갑 등은 무장투쟁노선과는 종래 그 성격을 달리하던 계몽운동 계열이었다. 결국 이들이 13도의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까지 민족운동선상에서 의병 계열과 대립 혹은 갈등 관계에 있던 계몽운동 노선이 의병과 합일, 공동전선을 모색하여 간 증거인 것이다. 선생이 참여하였던 13도의군의 활동 기간은 8월 국치 때까지 불과 2, 3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 유인석과 이상설은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할 계획 아래 광무황제에게 연명상소를 올려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과 연해주로의 파천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의병 통합을 표방하고 편성된 13도의군이 미처 항일전을 개시하기 전에 조국이 병탄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을 비롯한 13도의군의 간부들을 중심으로 성명회(聲明會)가 조직되었다. 성명회는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조치에 강력히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천명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결사이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연해주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선생을 비롯한 민족운동자들은 한인학교에 모여 비상시국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한 결과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를 맹세하고 성취’할 것을 결의하고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8월 26일 다시 모인 선생을 비롯한 성명회의 주요인물 50여 명은 빗속에서 조국독립의 결의를 거듭 다짐하면서 독립 전쟁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이후 성명회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 러시아에 산재한 한인사회에 배포하는 등 그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을 비롯한 한인동포들이 성명회를 조직하여 이처럼 활발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를 제기하였다. 동시에 선생을 비롯한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등 주요 인물들의 체포 인도를 요구하고 나왔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핵심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항일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성명회는 1910년 9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의 한인 민족운동자들은 현실적이고도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을 비롯하여 이종호, 이상설, 최재형 등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자들의 발기로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하는 자치결사로써 권업회가 1911년 5월 연해주에서 창립되었다.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한인사회의 권익을 증진시키는 ‘실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조국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는 권업회의 부회장, 나중에는 사찰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신문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 및 권익 보호에 심혈을 쏟았다. 선생은 권업회에 관여하면서도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 조직하였다. 이 회의 회장으로서 선생 또한 1913년부터 약 3년 동안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자금으로 선생은 소총과 탄약을 구입한 뒤, 이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제야 말로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당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던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와 상의하여 그 해 8월 마침내 항일무장투쟁의 길로 다시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우선 간도로 가서 그곳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추가 모집하여 부대를 확대한 뒤 국내로 진공할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부대는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인원 지원을 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에 약 300여 명의 병력, 소총 200여 정과 권총 약 30정의 화력, 그리고 지휘부는 사령관에 선생, 부사령관에 주건, 참모장에 박경철로 구성되어 있었다. 선생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같은 대한독립군의 활동은 다른 독립군 부대에도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이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경비 강화에도 불구하고 독립군 부대들은 국내 진공작전을 계속 결행하였고, 그 전과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과적이었다. 독립군의 국내 진공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강화했음에도 대대적인 기습을 받게 된 일제는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독립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추격군은 삼둔자의 서남방에 매복해 있던 최동진의 군무도독부 소속 독립군에게 재차 격퇴당하고 말았다. 독립군에 의해 연달아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번에는 약 250명의 병력으로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1920년 6월 7일 봉오동(鳳梧洞)으로 진군해 왔다. 이곳에는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선생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및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이 통합하여 조직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 그리고 이흥수가 이끄는 대한신민단이 일본군 침입자들을 맞아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일본군 추격대를 유인하여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선생이 이끈 독립군 통합부대가 승전하게 된 요인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 구사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독립정신이었다. <독립신문>(1920. 12. 25)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수많은 인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독립군측은 4명의 전사자에 2명의 중상자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공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작성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 분관을 습격,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측에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 자신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제는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독립군의 항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은 이 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이 있기 이전에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본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의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0년 10월 20일 선생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북로군정서, 대한신민단,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부대는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첩보원의 보고에 의해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따라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이곳에서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전투가 일어난 지역은 한인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본군 야마다(山田)토벌대 간에 10월 21일 오전 8시경부터 전개된 백운평 전투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본군을 백운평 골짜기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함으로써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선생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는 2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 일본군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선생이 지휘하는 독립군 통합부대와 북로군정서는 합동으로 10월 26일까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회의 격전을 치렀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의 전과 및 피해는 자료마다 서로 다르지만 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전사자는 1,200여 명에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뿐이었다. 이후 선생은 700여 명의 독립군 통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 간도토벌대와 격전을 치르면서 1921년 1월 하순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을 거쳐 자유시로 들어갔다. 이 시기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와 간도 독립군은 자유시 일대로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부대의 전격을 통합하고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항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결한 한인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지도부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국동공화국 한인부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 산하의 대한의용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 하에 조직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지도하는 고려혁명군 간의 군권대립이 그것이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상해 임정과 연관을 가지고 있었고, 중심 인물은 이용, 채영, 박일리아 등이었다. 군정의회에는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유동열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 대한의용군에 참여하여 부총재로 선임되기도 하였으나,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6월 28일 군정의회 지도부는 완강한 대치상태에 있던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장갑차 등 중화기까지 동원한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하여 쌍방간의 대충돌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사변으로 불린 이 같은 한인 무장세력 간의 분쟁으로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는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었다. 자유시사변 이후 한인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선생도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선생은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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