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상징이 되어 버린 바게트프랑스인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은 머리에 베레(béret)를 쓰고, 한 손에 긴 바게트빵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오후 여섯 시쯤 되면 실제로 거리에서 이렇게 긴 빵을 들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빵이 한 나라의 상징이 되어 버린 나라로는 프랑스가 유일할 것이다. '지팡이'라는 뜻의 바게트 빵은 그 생김새 때문에 바게트라고 불리는데, 이런 모양을 갖게 된 것은 불과 200년이 채 안 된다.
15세기의 빵은 커다랗고 둥근 공 모양이었다. 제빵사들이 반죽을 공 모양으로 둥글게 굴려서 빵을 만들었던 것이다. 공은 불어로 불(boule)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때부터 제빵사를 '공 모양으로 반죽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불랑제(boulanger)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빵을 만들 때는 여러 종류가 섞인 밀가루를 사용하였다. 사실 일부러 섞어서 사용했다기보다는, 어떤 종자가 병충해를 견디고 살아남을지 확신을 가질 수 없어 여러 종을 동시에 파종(播種)하였기 때문에 섞인 밀을 수확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섞인 밀가루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빵의 겉껍질은 두터웠으며, 속살은 퍽퍽했고, 소금은 비싸다는 이유로 넣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렇게 만든 거친 빵조차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더 가난한 이들은 비스뀌(biscuit)를 사먹었다. '두 번 구웠다'는 뜻의 비스뀌는 하루 지난 빵을 한 번 더 구움으로써 보관시간을 늘인 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비스뀌는 아침식사용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지만,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예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태양왕 루이 14세 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가 가장 좋아하던 흰 빵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맥주의 효모와 부드러운 밀가루를 사용한 이 빵은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들처럼, 파리도 흉년에 시달리게 되었고, 1787년 곡물가격 인상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그에 이은 연속된 흉년은 2년 후 일어날 대혁명의 불씨 역할을 하게 된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지금의 모양과 비슷한 바삭바삭한 껍질의 바게트가 나왔고, 반죽기계의 출현으로 불랑제들은 쉽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파리지앵들은 맛난 바게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최고의 바게트는 우선 겉이 바삭해서 손으로 자를 때 바삭거리며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 단면은 너무 희지 않은 크림 색깔이어야 하며 눌렀을 때 탄력이 있어야 하고 작은 구멍들이 보이는 속살의 맛은 우유처럼 담백하면서도 아몬드처럼 고소해야 한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공장에서 대량 생산 방식으로 구워낸 바게트는 반죽하고 숙성시키는 시간의 단축으로 인해 속살의 맛이 싱겁고 구멍이 커서 금방 말라버렸는데, 겉은 전혀 바삭거리지 않고 물렁거리는 이런 맛없는 바게트를 파리지앵들이 외면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게트 이런 상황에서 의식 있는 장인(匠人)들에 의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운 바게트를 부활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 뤽 푸조랑(Jean-Luc-Poujauran)이었다. 그는 정성껏 갈아낸 질 좋은 밀가루를 사용하였고, 빵에 맛이 들도록 천천히 지속적으로 발효시켰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파리 뒷골목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조차 맛난 바게트뿐만 아니라 각종 허브와 향신료, 견과류 등을 첨가한 새로운 빵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1년에 3,200만 톤의 빵을 생산하는 3만 5천 개 이상의 불랑쥬리(boulangerie)가 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19세기에 비해 빵을 적게 소비한다. 하루에 500g씩 먹던 빵을 이제는 150g 정도밖에 먹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해도 아침에 갓 구운 따뜻하고 바삭거리는 바게트에 신선한 버터를 발라 먹는 그 맛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