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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육아 | ||||||
젊으니까 좁은 데 살아도 괜찮다고? 유빈유나맘 | 2019.09.21 | 조회 240 | 추천 0 댓글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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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공간은 몇 평일까. 부동산에 대한 감각이 전무해 제곱미터를 평으로 어떻게 계산하는지도 무지한 사람 처지에서는 한 사람이 살기에 쾌적한 공간의 넓이란 그저 ‘넓을수록 좋겠지?’ 정도다. 상경해 서울에서 홀로 살기 시작하면서 2년에 한번씩은 꼭 이삿짐을 싸야 했고, 지금 사는 집은 다행히 첫 집에 비교하면 넓어진 편이다. 작은 집에서 시작해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아 살 집의 평수를 넓혀갔다…는 ‘도시 전설’이 이뤄졌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다만 ‘넓은 대신 교통이 불편하고 매우 낡은 빌라’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가끔 서울주택도시공사(SH)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누리집에 들어가 임대주택 공고를 둘러본다. 물론 신혼부부 혹은 부양가족이 있는 50대 이상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공고가 대부분이라 한숨만 쉬다 나온다. 정부의 주거지원 정책 안에 들어가려면 신혼부부이거나 국가 출생률에 이바지하거나, 벌이가 없이 몸이 안 좋거나 가족과 자산이 없는 노인이어야 한다. 물론 정부의 주거지원책이 저소득층과 사회에서 제일 열악한 ‘허약계층’부터 챙겨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세금 혜택을 비롯한 여러 정책으로부터 ‘혼자 알아서 잘할 것’을 요구받는 1인 가구는 주거에서도 ‘국가 덕 보고 싶으면 결혼하고 애 낳으라’고 종용당하는 것만 같다. 다행히 아직은 청년의 범위에 들어가는 나이라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청년을 위한 주거 정책인데, 얼마 전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운영하는 장기임대주택 공지를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1인 가구는 40㎡ 이상의 주택 평형에는 신청서조차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쪽방보다 넓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 40㎡면 12평이다. 딱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빌라 정도의 크기다. 나는 새삼 현 거주지를 둘러보며 ‘아, 이 정도가 국가가 내게 허락한 넓이구나’ 싶어졌다.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제공하는 1인 가구 행복주택의 최대 평수 역시 39㎡였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누가 정해놓은 걸까. 의외로 국가가 정한 ‘인간의 최소 주거면적’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했다. 국토교통부에서 정한 한국인 최저 주거면적은 12㎡였지만 2011년 상향되어 현재는 14㎡라고 한다. 14㎡면 4.2평이다. 5평에 살아본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원룸 안에 부엌, 화장실, 옷장과 책상까지 놓고 나면 딱 싱글 침대 하나 놓고 그 앞에 티브이 하나 놓을 수 있는 넓이다. 그보다 더 좁은 쪽방에서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 정도면 ‘혼자 살기에 충분’하다고 말해도 되는 평수일까. 그런데 ‘혼자 사는데 그 정도면 충분’이라는 기준은 누가 정해놓은 것일까. 얼마 전 역세권 청년주택의 공고가 공개됐다. 1인 청년주택의 크기는 16㎡(4.84평)였다. 이 크기는 어떤 조사로 정해진 것일까 궁금했는데 국토교통부에서 정한 최저 주거면적보다 2㎡나 큰 크기였다니.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 파콤은 소작농이었다. 처음엔 경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내 땅만 있어도 좋겠다 했던 파콤이지만 작은 땅이 생기자 더 욕심을 내게 됐고 욕심을 내다가 결국은 자기 몸 하나 누일 정도의 ‘관’이 묻힐 땅만 가지게 된다. 물론 여기서 땅이란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은유하는 소재에 불과하지만, 한몸 누일 정도의 공간조차 현재 없고 또 앞으로도 갖기 어려운 나에게는 그다지 교훈적인 소설은 아니다. 이미 쪽방이라는 이름의 좁은 주거 형태를 만들어내고 또 유지하고 있는 도시인에게는 ‘더 욕심부리지 말라’는 말이 그다지 와닿지도 않는다. 거실과 방이 분리되어 있고, 침실에서 일어나 조금 걸어서 부엌으로 이동해 요리를 하고 그 음식을 들고 이동해 거실에 앉아서 밥을 먹고 다시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고, 좀 쉬다가 다시 방으로 와서 책상에 앉아 일을 하는 소소한 일상…. 행위에 따라 공간을 분리하고 필요에 의해 이동을 할 수 있는 집에 살게 되면서 ‘아, 나는 집에서 동선이 필요한 사람이었구나’ 깨닫게 되었다. 반나절만 집에 있어도 이내 답답해져서 일거리를 싸들고 카페라도 가서 앉아 있었던 것은 허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집에 동선이 생기고 여기가 답답하면 저기로 이동해서 아침과 낮과 밤, 시간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이내 여기가 ‘집’이라고 감응할 수 있었다. 열악함과 비교하는 주거의 하향 평준화 사실 이 글을 쓰기 직전 에스엔에스(SNS)에서 5평 내외의 원룸인 역세권 청년주택에 대해 “‘대학생이니까’, ‘아직 어리니까’, ‘이 정도면 고맙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구도 좁은 데 사는 게 괜찮을 수 없다”라는 글을 봤다. 젊거나 혼자이거나 사회초년생이라는 것이 ‘좁은 데 살아도 괜찮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나는 조금 어지러웠다. 댓글들은 “그럼 돈 벌어서 큰 데 사세요”, “더 좁은 고시원도 역세권이면 60만원인데 (그 가격에 더 넓은 걸 바라다니) 도둑놈 심보네”, “이런 복지가 얼마나 필요한데 그러냐. 대안 없으면 조용히 하라”, “누구나 넓은 집에 살아야 한다가 무슨 천부인권인 줄 아느냐”며 원래 글에 냉소를 퍼부었다. 비싼 역세권 고시원 가격에 비하면 청년주택이란 복지는 누군가에게 간절하다는 댓글도 맞는 말이긴 하다. 역세권에 5평, 17만원 월세의 청년주택은 서울 역세권의 살인적인 집세를 생각하면 ‘청년 복지’로서 훌륭하다. 좁은 집이 싫으면 돈 벌어서 큰 집 사라는 누군가의 댓글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 더 열악한 환경과 비교하며 삶을 하향 평준화 시켜 버리는 데 동의한 것일까.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도 모자라 쪽방, 비닐하우스, 임시 판잣집까지 도시의 마지막 잠자리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부엌에서 생선을 구울 때 방문을 닫으면 옷에 냄새가 배지 않는 것에 감탄하고, 겨우 네 발자국이지만 방과 거실 사이에 생긴 동선이 신기해 가끔 일없이 왔다갔다 해본 나는 누구도 남의 주거에 대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섣불리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말할 수 없다. 반지하에서 2층으로 이사온 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뭉클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집은 곧 생활이고 삶이고 마음이라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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