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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1960년대 한국영화 다시보기 배고픈막내 | 2011.03.10 | 조회 28,461 | 추천 71 댓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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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그리고 50년부터 3년간의 전쟁. 그 시기 영화인들은 주로 종군 영화인 신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은 주로 전쟁 중의 사회 문제를 다뤘다. 이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사회적 배경과 비슷한 환경탓도 있지만 전쟁 후 리얼리즘 장르가 한국의 감독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헐리웃 영화와 가까운 일본 영화의 영향은 우리 영화의 고유한 색채를 갖출 겨를도 없이 그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1960년 4월 4.19혁명 및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이뤄지고 그 혼란의 와중에도 여러 편의 영화가 제작되는데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는 실직당한 아버지를 감싸는 가족들의 따뜻한 모습으로 실직가장이 경험하는 당시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통속극 구조로 당시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웃음과 사랑으로 타개해 가는 과정은 마치 90년대 헐리웃과 우리 영화에서 보여지던 로맨틱한 가족극과 많이 닮아 있다. (가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들의 사소한 갈등과 종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어지는 구조) 그 해 10월에 발표된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에서는 당시 서민들의 애환과 자식 사랑 그리고 그 자식 세대들이 성취해 가는 사회적 지위 상승으로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로 당시 사람들을 달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박서방 역할을 맡은 '김승호'씨는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한다. 60년대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가장의 모습은 때로는 초라할 정도로 우습고 아무런 부권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60년대의 남자들의 지위와 권력에 얽눌린 지식인들의 시대상을 읽게한다. 또한 동시대 감독들이 그들을 단지 허수아비 가장이 아닌 자기-연민에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60년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위에 언급한 두 영화 외에도 식모와의 관계 후 그녀의 억눌리는 작곡가의 불안한 심리를 다룬 김기영 감독의 <하녀>, 한 여학생을 두고 두 남학생이 벌이는 통속극인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가진 여자와 유부남의 사랑을 여러 에피소드로 복잡하게 엮은 후 결말에서 탈선을 용납하지 않는 권영순 감독의 <표류도> 등이 있다.
61년에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감독 (신상옥과 홍성기)이 동시에 컬러 영화<춘향전>을 만들며 시대의 암울함과는 달리 영화계는 활기를 띄는데 감독과 주연이 나란히 부부라는 점에서 더더욱 화제였다. (그리고 신상옥과 홍성기는 <자유만세>(46)를 만들었던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이 대결에서는 신상옥의 <성춘향>이 압승하게 되고 이후 신필름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제작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또한 전해의 <로맨스 빠빠>의 흥행에 탄력을 받은 코미디 작품들이 선을 보이는데 정치적 풍자와 당시 신구세력의 갈등을 코믹하게 다룬 <서울의 지붕밑, 이형표> 부정적인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꼬고 웃음짓게 하는 <삼등과장, 이봉래>,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등이 나왔다. 신상옥 감독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발표하며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당대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 집 식모와 계란 장수가 벌이는 애정 장면을 통해 둘의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을 대리 충족시켜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그것은 당시 관객들이 외도를 성사 시키지 않는 영화에 안심을 하면서도 식모와 계란 장수가 벌이는 러브 씬을 즐기는 이중적인 모습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61년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정창화 감독의 액션 느와르물 <노다지>,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 강대진 감독의 <마부>,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 신상옥 감독의 문예 영화<상록수> 이만희 감독의 <불효자> 등이 있다. 이 중 <마부>는 제1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 했으며, 7월에는 전쟁 직후 비참한 서울의 모습과 가난과 실향 전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영화의 방식을 적절하게 혼용한<오발탄>이 당국의 재검열 지시로 상영이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5.16 군부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가한 최초의 압력이었다.
대중들 현실에서의 도피심리 영화로 풀어내다.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고 박정희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영화 제작 시장은 활기를 띄었지만 전쟁 직후 암담함과 실존적인 고민을 담아냈던 영화들의 기운은 사그라들고 소시민 가정을 무대로 한 코미디와 홈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된 시기. (5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오던 실존주의 영화들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으로 자극을 받은 듯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진지한 주제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현실을 잊고 영화를 즐기고 싶었던 대중들의 욕구는 홈코미디류의 다작들을 양산하게 한다.) 김용덕 감독의 <와룡선생 상경기>와 이강천 감독의 <무정>이 발표되고 195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이 이용민 감독의 <맹진사댁 경사>로 다시 만들어졌다. 62년 1월부터 <연산군, 신상옥>을 필두로 한 사극물의 제작도 눈에 들어온다. 62년의 제작된 사극은 2월 <폭군 연산, 신상옥>, 4월 <암행어사 박문수, 이규웅>, 9월 <인목대비, 안현철>, <화랑도, 장일호>, <왕자호동, 한형모>까지 당시 정치상황을 묘하게 빗댄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냉소는 없었고 오히려 반공적인 부분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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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임권택 감독이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데뷔를 했으며,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은 항일전사들의 레지스탕스 액션물이었다. 오랜 무명 연출부 생활을 접고 감독으로 입봉하였으나 평범한 액션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봉래 감독의 <월급쟁이>,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가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또 박남옥 감독 <미망인, 1955>에 뒤를 이은 두번째 여성감독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가 나왔다. 이 영화는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여판사의 죽음을 소재로 삼은 영화였다. 사극이 많이 나온 시기지만 당시 정권에서 다룬 사극들은 '시대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인물에 관한 조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왕이나 왕족에 연관된 인물들에 괴팍한 기행이나 기구한 운명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현상'이나 '광기'가 아닌 개인의 욕심과 잘못으로 그려지는 편협성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영화인들의 지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정부에 검열에 의한 폐쇄적인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권은 영화문화에 대한 검열이 상당했으며, 이른바 '반공영화'를 통해 국민의 세뇌화를 가속화 시키는 단계였다.) #사진3#
청춘물들의 본격적인 시작 1963년 한국영화 시장
1963년은 청춘 멜로물이 만개한 시기였다. 이 영화들은 당시 일본영화나 시나리오에서 표절 혐의를 받은 작품들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젊은이들의 소리를 담아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 이형표 감독의 <말띠 여대생>, 이성구 감독의 <미스김의 이중생활> 등이 그 해를 대표하는 청춘물이다. 반면 순정과 희생을 바탕에 깐 이른바 정통 멜로 드라마로 김응천 감독의 <지미는 슬프지 않다>와 계몽적인 성격의 <쌀, 신상옥>과 함께 코미디 부분에서의 최영철 감독의<로맨스 가족>,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그레이> 라디오 드라마 원작의 박상호 감독의 <또순이>가 히트를 쳤다. 유현목 감독은 박경리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하는데 가부장제의 허약함, 일제에 부권을 빼앗긴 한국남성들의 열등감을 심도있게 묘사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무너지는 이 남성 가부장들에 대한 시선 뒤에는 자기연민이 숨어있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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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발표된 그외 주요작품으로는 이만희 감독의 전쟁 혐오 심리를 바탕에 깐
1968년 영화계는 멜로영화의 강세가 단연 돋보인 한 해였다. 66년 최고의 히트작인 <초우>, <초연>은 67년을 거치면서 진정한 멜로영화의 시작을 가져왔고 68년 7월에 개봉한 <미워도 다시한번, 정소영>은 국도극장에서 64일동안 37만 4천 명이란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신기록을 수립하는 동시에 멜로영화의 전성기를 가져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성관객들을 극장 앞으로 모여들게 한 멜로물의 힘이다. 그동안 반공, 문예, 사극, 코미디물에 밀려서 애매모호한 형태의 신파극으로 일관하던 멜로물은 <초우>, <초연>이후 당시 젊은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꿈과 사랑을 얘기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선배세대 즉 <미워도 다시한번>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멜로의 비극적인 여주인공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것이다.
68년에 제작된 반공영화는 총 19편으로 멜로영화 주류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한때의 유행을 노린 허술한 작품들이 많아 더더욱 관객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자리를 잃고 있었다. 또한 68년에는 당시 동남아시아를 휩쓸던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액션영화들도 상당 수 선보이게 되는데 <유랑의 검호, 김시현>, <풍광객, 임원식>등이 있었고 이런 액션영화들은 계속 젊은 남성관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이어간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시대극 액션영화라고 분류가 되는데 역사극의 옷을 걸친 그야말로 국적불명, 역사적 근거가 전무한 창작 오락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인기를 모은 코미디영화 장르에서는 <남자 식모, 심우섭>, <속 팔도강산, 양종해>이 문예영화로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 최하원>, <카인의 후예, 유현목>, <장군의 수염, 이성구>, <여자의 일생, 신상옥>등이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
68년 최고의 코드는 단연 '여성'이다. 이는 문예영화로 분류되는 신상옥 감독의 <여자의 일생>과 최고의 히트작인 <미워도 다시한번>에서도 잘 나타났다. 혼외정사를 저지른 여자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과 처참한 상황에 놓인 여자에 대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여성관객들은 극장으로 이끌었다. 또한 김기영, 유현목, 정진우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여.여.여>는 68년 한해 불어닥친 여성영화 열풍에 대한 나름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며 그 해를 마무리한다.
1969년은 한국영화 최고의 해로 기억된다. 총 229편의 영화가 제작되며 일본에 이어 아시아 영화 최강국으로 성장한다. 서울의 헐리웃이라 불린 충무로에는 그야말로 활기가 넘쳤다. 현대문명 사회에 소외된 어린이들이 한 교사의 노력으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게되는 설정에서 출발하여 동심이 겪는 신문화의 희비극을 담은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은 아직 '서울'이란 낯선 땅에 미지의 동경을 꿈꾸던 관객들의 입맛에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노인>이 최하원 감독에 의해 문예영화로 만들어지고, 59년작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김 기(이름이 외자다.) 감독에 의해 리바이벌 된다. 또한 56년 문제작 <자유부인> 역시 강대진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모윤숙이 쓴 <렌의 애가>가 김기영 감독에 의해 각색, 해석 되어 영화화 되었다. (시집을 영화로 각색한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6. 25전쟁 때 한 성직자가 성당 지하실에 감금되고 성직자를 방패삼은 북한군, 추적하는 한국군들과의 심리전을 담은 <지하실의 7인>은 마지막 반공영화의 이색적인 반향을 제시했다. 지난해의 멜로붐을 그대로 이어간 것이 69년 영화계라 할 수 있으나, 또 이색적인 것은 액션영화의 상승세다. 김기영 감독의 <렌의 애가>를 시작으로 <별은 멀어도, 홍성기>, <속 미워도 다시한번, 정소영>등 멈추지 않는 멜로영화의 행진은 계속되었고 <팔도 사나이, 김효천>, <암살자, 이만희>, <북경열차, 권철희>, <재생, 강대진>등의 액션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어 인기를 모았다. 신상옥 감독은 <이조여인 잔혹사>를 통해 당시의 영화계 여성 풍속도를 은유적으로 꼬집었다.
1960년대 영화약사를 정리하며 전후 황폐해진 사회분위기를 짙게 반영하던 60년대 초반 모더니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주의 영화들은 60년대 말로 가면서 그 힘을 잃는다. 이는 당시 군부의 문화말살, 국민들의 의식권리를 박탈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다. 국민을 도덕적으로 계몽한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문화, 예술인사들의 창작권리를 박탈하고 그나마 작가주의 성향이 강했던 감독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일방적인 통제와 금기로 영화인들의 의욕을 꺾어버린다. 또한 당시 젊은세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60년대 후반에 선보이는 저질영화들, 반공영화들 제작으로 정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암울한 사회를 대변하듯 80년대말까지 그 통제가 끊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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