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노래와 운동
1981년 여름, 군에서 휴가를 나온 김선출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광주 운암동 주택가 골목에 들어섰다.
저만큼 2층 양옥집이 눈에 띄었다.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의 집(현재 광주 문화예술회관 자리)이었다.
입대 전만 해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나들던 곳으로, 그뿐만 아니라 광주 ‘딴따라’들에게는 하나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혹시 누구 지켜보는 눈길이 없을까 살피는데, 담벼락 위로 솟아오른 장미가 유난히 새빨갰다.
5월 항쟁에 참가했다가 구속되고, 강제 징집돼 군대에 간 몸이니 불안감이 없을 리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할 자리였다. 잠시 후 그는 겨우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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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서재에는 이미 낯익은 얼굴 여러 사람이 와 있었다.
집주인 황석영 외에도 오창규(전 광주문화방송 PD), 김종률(당시 백제야학 강학), 임희숙(당시 극단 광대 회원) 등의 얼굴이 보였다. 창에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두꺼운 군용 담요가 덧대어 있었다.
김선출은 꽹과리를 들고 입구 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오창규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장단을 맞추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날 그들이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녹음한 노래의 제목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80년대를 관통하는 가장 대표적인 운동가이면서, 지금도 각종 집회 현장에서 불려지고 있는 ‘제2의 애국가’였다.
소설가 황석영이 마무리를 한 노랫말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80년 12월)에서 따온 것이었다.
원래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세월은 흘러가도/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소리치는 피맺힌 함성/앞서서 나가?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이듬해 2월20일, 광주 망월동 시립묘지의 한 구석에서는 한 쌍의 결혼식이 거행됐다.
죽음의 묘지에서 새 삶의 결혼식이라니! 그러나 사실이었다.
그날 결혼식은 두 젊은 영혼이 이승에서 못 이룬 삶을 정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신랑은 윤상원. 광주의 현대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전사’ 중의 한 사람.
신부는 박기순. 지식인으로서 노동자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가 비운의 죽음을 당한 여성 일꾼.
그 둘은 죽어서, 그것도 참으로 억울하게 죽어서 한 곳에서 만난 것이다.
영혼 결혼식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신랑 신부가 쓸 이불이며 옷가지는 물론이고 결혼식 축의금을 받는 접수대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식장이었다.
장성 임곡에서 온 무녀가 한바탕 굿을 하고, 시인 문병란이 준비해 온 시로 주례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난 후 누가 시작했는지, 나지막한, 그러면서 무엇인가 가슴을 통째로 적시는 노래가 이어졌다.
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 공식적으로 불려진 첫번째 자리였다.
그후 그 노래가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카세트라디오로 녹음을 해서 부랴부랴 만든 테이프는 정신없이 복제되기 시작했다.
80년대 노래운동사는 이 노래를 빼고는 도무지 성립되지 않는다.
무수하게 많은 시위 현장, 무수하게 많은 술자리, 무수하게 많은 농성장에서 처음과 끝은 늘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노래를 불렀다.
부르면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우곤, 겸연쩍은 듯 고개를 슬쩍 돌렸다.
‘님을 위한 행진곡’과 더불어 80년 5월 광주를 대표하는 또 한 곡의 노래가 있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1절)/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2절)/
/산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욕된 역사 고통없이 어떻게 깨치고 나가리(3절)/
/대머리야 쪽바리야 양키놈 솟은 콧대야/물러가라 우리 역사 우리가 보듬고 나간다(4절)”
5월의 비극을 매우 직설적으로 고발하고 그런 비극을 넘어서 투쟁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자고 호소하는 이 ‘5월의 노래’는 누가 만들었고 누가 처음 불렀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 노래는 프랑스의 샹송 가수 미셀 폴나레프의 노래 ‘어느 할머니의 죽음(Qui A Tue Grand Maman)’을 번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곡은 매우 서정적이다. 그런데 이 노래는 지극히 격정적이다.
끓어오르는 분노, 입술이 터져라 깨무는 다짐, 그리고 마침내 자주적인 새 역사를 이루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를 한데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래는 80년대 내내 저항운동의 가장 중요한 무기 중 하나였다.
80년대 초반, 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고 있던 서울대의 ‘메아리’를 비롯해 고려대의 ‘석화’(80), 성균관대의 ‘소리사랑’(83), 연세대의 ‘울림터’(84), 부산대의 ‘소리터’(84), 숙명여대의 ‘한가람’(84) 등 대학내 노래패들이 속속 생겨나 노래운동을 주도했다.
“공연 시작 2시간 전부터 서 있던 줄은 공연 전에 이미 200~300m를 넘어섰다.
… 사회를 보던 79학번 노승종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면서 메아리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이슬’의 전주 트레몰로.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알알이 맺힌 설움이 눈물이 되어 이슬처럼 흐른다.
눈과 귀와 입이 막힌 채 자유를 구속당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우리가 함께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감동 하나로 눈물이 가득히 흘러내린다.”
(서울대 ‘메아리’ 81학번 이창학, ‘메아리’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80년대 초반의 이런 분위기는 83년 12월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를 계기로 급변한다.
그때까지는 김민기류의 노래나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수준의 노래들이 주류였다.
특히 ‘노가바’는 당대의 엄혹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선택이었다.
기존 노래말에 간단히 ‘둥’이라는 불확실한 추측을 나타내는 불완전 명사를 붙이거나 ‘돈 있으면’이라는 후렴구를 붙임으로써 원래의 노래를 전혀 다른 노래로 만들어낸 ‘아, 대한민국’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늘엔 조각 구름 떠 있다는 둥/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다는 둥…/
원하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돈 있으면 돈 있으면)…”
(‘아, 대한민국’ 노가바)
‘노가바’는 전복과 폭로와 야유의 미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지만, 노래로서의 독립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가바’가 한국 노래운동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한 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어쨌든 84년부터?노래의 내용도 급속히 성장한 당대 운동권의 요구를 반영,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전투성을 담아낸다.
급기야 86년 무렵에는 운동권에서조차 “너무 앞서 가는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노래까지 나온다.
“제국의 발톱이 이 강토 이 산하를/할퀴고 간 상처에 성조기만 나부껴/
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 걸고 나가자/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이 목숨 다 바쳐/해방의 함성으로 가열찬 투쟁으로/반전 반핵 양키 고 홈!”
(‘반전반핵가’)
“이 노래는 86년 서울대 학생인 김세진·이세호 두 명 벗들의 동반 자살에 충격을 받고 만들었다.
… 이 노래가 처음 불려졌을 때 양심적인 지식인과 운동가, 종교인마저 ‘쁘띠 부르주아적인 발상으로 튀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비난의 속사정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는지 모른다.
지식인들은 문제의 본질과 싸울 때는 그 현장을 빠져나간다.
이분들은 탄압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매도했지만 학생들은 이 노래로 반미운동의 불길을 지폈다.”
(작곡가 박치음, 2001년 6월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지식인들, 미국에 부역하고 있다’)
어찌 노래뿐이랴!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대표되는 80년대의 저항가요들을 빼놓고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제대로 그려질 수 없을 것이다.
-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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