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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스무살 봄날의 짜장면
필기 | 2012.01.13 | 조회 14,200 | 추천 103 댓글 1


다시 봄입니다.

어느해 봄인들 새롭고 반갑지 않겠습니까만, 스무살 시절의 봄처럼 새로운 봄은 없을 겁니다. 더구나 대학이라는 설레는 공간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았던 그 때의 봄은 남달랐습니다.


낯선 도시, 낯선 얼굴들, 낯선 수업 방식...

유난히 꽃샘 추위가 심했던 80년대 중반의 어느해, 저는 3월이 다 가도록 어깨를 웅크리고 캠퍼스를 종종거렸습니다.


#사진1#



낯설고, 외롭고, 추우면 왜 배는 더 고플까요?

점심시간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 대학이라지만 저는 유난히 배고픔을 자주 느꼈습니다. 대학 구내식당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따뜻한 음식냄새 쪽으로 저절로 고개를 돌리곤 했었지요.

그러다가 때로는 230원씩 하던 자판기 컵라면을 먹기도 했을 겁니다.

 



 


 


햄버거나 라면을 먹는 날도 있었지요.

라면이나 햄버거 둘 가운데 하나를 먹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야말로 어쩌다 두 개를 함께 먹는 날은 무척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다른 친구들도 그랬다고 합니다.

참! 500원의 행복을 그렇게도 크게 느낀 가난한 대학생들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같은과 2학년이던 여자선배를 만났습니다.

뭔가 결의에 가득찬 얼굴을 하고서 선배는 말을 참 많이 아꼈습니다. 그저 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요. 그러다가 가끔씩 한 마디 던졌습니다.

 

"어때, 지낼 만하니?"

"
부모님이 농사 지으신다고?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맨날 그런 투였습니다.


어쩐지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이 그 무렵 캠퍼스의 분위기와도 많이 닮았었지요.

긴장과 불안으로 팽팽하다 못해 터져버릴 것만 같던 분위기 말입니다.

저는 그저 눈만 휘둥그레 굴리며 앉아있을 뿐이었지만 선배에게서는 어떤 거역하기 힘든 진실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얼마 뒤, 학회장 선거전이 시작됐습니다.

저희
과에서는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팀과 현역 팀이 경합을 벌이게 됐습니다. 두 팀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한 표'를 부탁했지요.


저는 현역팀 후보와 함께 다니는 예의 여자 선배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 다.

어쨌거나 두 팀 모두 같은 과 선배였습니다.

한테는 누가 되든 큰 관심거리도 아니었지요. 하지만 막상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았나 봅니다. 판세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으니까요.



적게는 '복학생'과 '현역'. 크게는 '민주'와 '덜(?) 민주'. 또는 진보와 보수...

뭐, 지금 생각하니 그 쯤 됐을 겁니다. 선거전은 날이 갈수록 꽤 치열해졌지요.


마침내 투표날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때였지요. 가끔씩 눈인사를 하던 복학생 선배가 저와 이제 막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던 친구 셋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무작정 학교 앞 중국집 북경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짜장면! 그 고소하고 푸짐한 별미! 

저와 친구들은 공짜로 굴러온 짜장면을 앞에 하고 거의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햄버거보다 컵라면보다 몇배는 더 맛있는 짜장면 그릇을 비우고 나서 저희는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고 말았습니다.


복학생 선배가 웃으며 남긴 한 마디 때문이었지요.

"투표 때 보자! 알지? 우리 편 찍는 거. 믿는다!"


마침내 꺼림칙한 마음으로 투표장에 갔습니다. 사실, 그렇게 꺼림칙할 필요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투표는 비밀 투표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 저는 멍청할 만큼 순진했습니 다. 순수가 아니고 순진 말입니다. 짜장면 한 그릇도 못이기는 무력한 '순진'이었지요.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4표! 딱 4표 차이로 복학생 선배가 이겼지요.


쿵! 제 가슴 속에서 부끄럽고 아픈 소리가 울렸습니다.


함께 짜장면을 얻어먹은 친구들은 누구를 찍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공교롭게도 4표 차이였습니다.


짜장면만 아니었어도 제가 그렇게 투표결과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비실비실 개표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제 눈에 패배의 실망으로 고개를 떨군 여자 선배의 얼굴이 언뜻 보였습니다.


스무살, 그 찬란하던 봄날, 그렇게도 부끄러운 짜장면 한 그릇을 먹었습니다.

평생 소화되지 않을 짜장면이었지요. 

 

※이 글을 쓴 박수현님은 전남 구례 출신으로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번역자이며 현재 동화창작·번역집단 '바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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