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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1960년대 한국영화 다시보기
배고픈막내 | 2011.03.10 | 조회 28,521 | 추천 71 댓글 2

















1945년 해방 그리고 50년부터 3년간의 전쟁. 그 시기 영화인들은 주로 종군 영화인 신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 시기에 제작된 영화들은 주로 전쟁 중의 사회 문제를 다뤘다. 이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사회적 배경과 비슷한 환경탓도 있지만  전쟁 후 리얼리즘 장르가 한국의 감독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헐리웃 영화와 가까운 일본 영화의 영향은 우리 영화의 고유한 색채를 갖출 겨를도 없이 그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다.



1960년 4월 4.19혁명 및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이뤄지고 그 혼란의 와중에도 여러 편의 영화가 제작되는데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는 실직당한 아버지를 감싸는 가족들의 따뜻한 모습으로 실직가장이 경험하는 당시 사회를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통속극 구조로 당시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웃음과 사랑으로 타개해 가는 과정은 마치 90년대 헐리웃과 우리 영화에서 보여지던 로맨틱한 가족극과 많이 닮아 있다. (가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들의 사소한 갈등과 종국에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어지는 구조) 



그 해 10월에 발표된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에서는 당시 서민들의 애환과 자식 사랑 그리고 그 자식 세대들이 성취해 가는 사회적 지위 상승으로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로 당시 사람들을 달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박서방 역할을 맡은 '김승호'씨는 아시아 영화제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한다. 



60년대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가장의 모습은 때로는 초라할 정도로 우습고 아무런 부권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60년대의 남자들의 지위와 권력에 얽눌린 지식인들의 시대상을 읽게한다. 또한 동시대 감독들이 그들을 단지 허수아비 가장이 아닌 자기-연민에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사진1#

 

60년에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위에 언급한 두 영화 외에도 식모와의 관계 후 그녀의 억눌리는 작곡가의 불안한 심리를 다룬 김기영 감독의 <하녀>, 한 여학생을 두고 두 남학생이 벌이는 통속극인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가진 여자와 유부남의 사랑을 여러 에피소드로 복잡하게 엮은 후 결말에서 탈선을 용납하지 않는 권영순 감독의 <표류도> 등이 있다.



61년에는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감독 (신상옥과 홍성기)이 동시에 컬러 영화<춘향전>을 만들며 시대의 암울함과는 달리 영화계는 활기를 띄는데 감독과 주연이 나란히 부부라는 점에서 더더욱 화제였다. (그리고 신상옥과 홍성기는 <자유만세>(46)를 만들었던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이 대결에서는 신상옥의 <성춘향>이 압승하게 되고 이후 신필름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제작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또한 전해의 <로맨스 빠빠>의 흥행에 탄력을 받은 코미디 작품들이 선을 보이는데 정치적 풍자와 당시 신구세력의 갈등을 코믹하게 다룬 <서울의 지붕밑, 이형표> 부정적인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꼬고 웃음짓게 하는 <삼등과장, 이봉래>,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등이 나왔다. 신상옥 감독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발표하며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당대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 집 식모와 계란 장수가 벌이는 애정 장면을 통해 둘의 이뤄지지 못하는 사랑을 대리 충족시켜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그것은 당시 관객들이 외도를 성사 시키지 않는 영화에 안심을 하면서도 식모와 계란 장수가 벌이는 러브 씬을 즐기는 이중적인 모습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61년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정창화 감독의 액션 느와르물 <노다지>,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 강대진 감독의 <마부>, 이형표 감독의 <서울의 지붕밑>,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한형모 감독의 <돼지꿈>, 신상옥 감독의 문예 영화<상록수> 이만희 감독의 <불효자> 등이 있다. 이 중 <마부>는 제1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은곰상을 수상 했으며, 7월에는 전쟁 직후 비참한 서울의 모습과 가난과 실향 전쟁 후유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사실주의와 모더니즘 영화의 방식을 적절하게 혼용한<오발탄>이 당국의 재검열 지시로 상영이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5.16 군부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가한 최초의 압력이었다.



 


대중들 현실에서의 도피심리 영화로 풀어내다.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하고 박정희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영화 제작 시장은 활기를 띄었지만 전쟁 직후 암담함과 실존적인 고민을 담아냈던 영화들의 기운은 사그라들고 소시민 가정을 무대로 한 코미디와 홈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된 시기. (5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오던 실존주의 영화들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으로 자극을 받은 듯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진지한 주제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현실을 잊고 영화를 즐기고 싶었던 대중들의 욕구는 홈코미디류의 다작들을 양산하게 한다.) 김용덕 감독의 <와룡선생 상경기>와 이강천 감독의 <무정>이 발표되고 195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이 이용민 감독의 <맹진사댁 경사>로 다시 만들어졌다. 62년 1월부터 <연산군, 신상옥>을 필두로 한 사극물의 제작도 눈에 들어온다. 62년의 제작된 사극은 2월 <폭군 연산, 신상옥>, 4월 <암행어사 박문수, 이규웅>, 9월 <인목대비, 안현철>, <화랑도, 장일호>, <왕자호동, 한형모>까지 당시 정치상황을 묘하게 빗댄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지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냉소는 없었고 오히려 반공적인 부분이 강했다.

 

#사진2#




그외 임권택 감독이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데뷔를 했으며,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은 항일전사들의 레지스탕스 액션물이었다. 오랜 무명 연출부 생활을 접고 감독으로 입봉하였으나 평범한 액션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봉래 감독의 <월급쟁이>,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가 라디오 드라마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또 박남옥 감독 <미망인, 1955>에 뒤를 이은 두번째 여성감독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가 나왔다. 이 영화는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여판사의 죽음을 소재로 삼은 영화였다.



사극이 많이 나온 시기지만 당시 정권에서 다룬 사극들은 '시대성'을 이야기하지 않고 인물에 관한 조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왕이나 왕족에 연관된 인물들에 괴팍한 기행이나 기구한 운명을 시대의 흐름에 따른 '현상'이나 '광기'가 아닌 개인의 욕심과 잘못으로 그려지는 편협성을 보여준다. 이는 당시 영화인들의 지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정부에 검열에 의한 폐쇄적인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권은 영화문화에 대한 검열이 상당했으며, 이른바 '반공영화'를 통해 국민의 세뇌화를 가속화 시키는 단계였다.)

  

 

 

#사진3#



 


청춘물들의 본격적인 시작 1963년 한국영화 시장

 


1963년은 청춘 멜로물이 만개한 시기였다. 이 영화들은 당시 일본영화나 시나리오에서 표절 혐의를 받은 작품들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젊은이들의 소리를 담아 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김수용 감독의 <청춘교실>, 이형표 감독의 <말띠 여대생>, 이성구 감독의 <미스김의 이중생활> 등이 그 해를 대표하는 청춘물이다. 반면 순정과 희생을 바탕에 깐 이른바 정통 멜로 드라마로 김응천 감독의 <지미는 슬프지 않다>와 계몽적인 성격의 <쌀, 신상옥>과 함께 코미디 부분에서의 최영철 감독의<로맨스 가족>,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그레이> 라디오 드라마 원작의 박상호 감독의 <또순이>가 히트를 쳤다. 유현목 감독은 박경리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하는데 가부장제의 허약함, 일제에 부권을 빼앗긴 한국남성들의 열등감을 심도있게 묘사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무너지는 이 남성 가부장들에 대한 시선 뒤에는 자기연민이 숨어있어 의미심장하다.

 

#사진4#




63년 발표된 그외 주요작품으로는 이만희 감독의 전쟁 혐오 심리를 바탕에 깐 과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작인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만들어졌다. 또 김수용 감독의 월남한 가족을 중심으로 서민생활의 단면을 잘 표현한 <혈맥>, 그리고 일본의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보다 20년이나 앞선 김기영 감독의 <고려장>이 있다.



 







 










#사진5#






1964년에는 청춘물이 범람했던 시기였다. 63년 제작되었던 <가정교사>, <청춘교실>의 흥행 성공은 64년의 무려 10편이상의 청춘물의 제작을 가능케 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총각김치, 장일호>, <잃어버린 태양, 고영남>, <위를 보고 걷자, 김기덕>, <목마른 나무들, 배신 , 정진우>, <맨발의 청춘, 김기덕>, <바람난 고양이들, 김용언>, <빗나간 청춘, 노필>, <학사주점, 박종호>, <맨발로 뛰어라, 이용호> 등이 있다. 이러한 청춘영화의 돌풍은 소위 '청춘스타'로 일컬어지는 배우군을 양산해 내는데 신성일, 이대엽, 엄앵란, 태현실, 최지희, 방성자, 남정임, 문희, 윤정희 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모든 매스 미디어들이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거품처럼 보도하기 시작한 이때부터 일반인들 사이에선 현대판 신데렐라 '스타 증후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진6#






당시 최고 흥행작이었던 <맨발의 청춘>은 일본영화의 표절작품으로 알려져 아쉬움을 준다. 하지만 <맨발의 청춘> 외에도 일본영화를 부분적으로 표절한 작품들이 많았고 이런 경향은 국내작가들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닌 당시 한,일 젊은층 정서의 유사성과 국내 영화제작의 제약을 받는 부분에 대해 한국작가들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돈이 되는 흥행영화에 집중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당시 일본영화사를 대표하던 쇼치쿠 누벨바그 청춘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강도는 약하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서 당시 한국 청춘물들은 단순한 표절이 아닌 일본영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이 보여진다.)



그 외 제작된 영화들은 다양한 경향을 보여주는데 자신이 낳은 딸을 기르기 위해 식모로 들어가 사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행주치마, 이봉래>, 색정으로 처벌받고 창녀로 살아가는 한 여인과 깡패두목, 그녀를 돌보는 운전사 등의 이야기를 느와르풍으로 만든 액션영화 <검은 머리, 이만희>, 양공주 왕언니로 살아가면서도 세 딸을 훌륭히 키우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여인의 이야기 <육체의 고백, 조긍하>, <빨간 마후라, 신상옥>, <마의 계단, 이만희>, <사자성, 최인현>, <석가모니, 장일호> 등이 있다. 이 중 조긍하 감독의 <육체의 고백>과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은 한국적 리얼리즘과 히치콕식 치정, 심리극을 다룬 중요한 영화로 평가 받는다.



 

#사진7#






1965년의 최고 사건. 이만희 감독이 만들었던 <7인의 여포로>에서의 인민군에 대한 인간적인 묘사가 당시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고 반공법 위반으로 법적 제재를 받았다. 이에 유현목 감독은 공개적으로 이를 비난하는 문서를 작성 공개하는데 이에 대해 유감독은 그의 영화 <춘몽>이 외설적이란 이유로 정부로부터 고발당하기도 했다. 당시 군부는 전쟁물 뿐만 아니라 모든 영상관련문화에 대한 이른바 반공법이란 법률안으로 감시와 통제가 심했으며 이는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짓밟고 작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창작의 의지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정책은 9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사진8#






65년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가짜 여대생, 최훈>, <갯마을, 김수용>, <순교자, 유현목>, <비무장지대, 박상호>, <남과 북, 김기덕>, <산천도 울었다, 강찬우>, <저 하늘에도 슬픔이, 김수용>, 배우 최은희의 감독작품인 <민며느리>, <현금은 내 것이다, 이상언>, <사르빈강에 노을진다, 정창화>,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유현목>, <얄개전, 정승문>, <흑맥, 이만희>, <시장, 이만희>,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임원식>, <불나비, 조해원> 등이 있다.



















 







 











#사진9#






1966년 4월과 8월에 행해진 공연법과 영화법 개정은 국내 영화계의 많은 부도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정권은 베트남에 맹호부대 등을 증파하면서 국민 특히 젊은 세대의 감상주의를 경계하는 듯 문화 전반부에 거친 칼바람이 불었다. 당시 제일 잘 나간다는 신필름 조차 사정이 어려웠고, 탄탄하기로 소문난 극동필름은 결국 부도를 냈다. 정부는 정책을 통하여 영화를 더더욱 통제했고, 대종상에 반공영화 부분을 만들었으며, 이듬해부터는 우수한(?) 반공영화에 외화수입 쿼터를 주는 등 상식이하에 행태를 보여준다. 그 결과 66년에 발표된 반공영화는 25편 <죽은 자와 산 자, 이강천>, <8240KLO, 정진우>가 스펙타클 전쟁 영화. <위기113, 편거영>, <적선지대, 이한욱>이 간첩영화, <스타베리 김, 고영남>, <순간을 영원히, 정창화>이 국제 첩보영화로 <맹호작전, 김묵>, <소령 강제구, 고영남> 등이 월남전 영화로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의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펙타클과 첩보, 액션이 가미된 영화가 재미없다는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만 66년 영화들은 천편일률적인 반공주의로 국민을 통합시키는 무서운 파시즘을 내재한 문화말살 정책으로 밖에 읽혀지지 않는다. 당시 국민들은 가난한 현실과 막막한 앞날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지한 세대였으며 그런 국민들의 약점을 이용한 정권은 분명 잘못된 왕국이었다.

 


반공영화 :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영화장르다. (물론 대만과 같이 국내와 유사한 역사를가진 나라에서도 이런 부류의 영화가 있었긴 했지만 한국처럼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분단국가'라는 특수성과 그 점을 이용하여 좌파, 우파를 가리며 색깔론에 집착했던 당시 정권이 만든 슬픈문화. 마치 미국 정부가 그들의 영화의 적극적인 협조를 하며 전세계를 상대로 가짜 문화 주입을 하는 것처럼 당시 한국은 영화가 인간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반공영화'라는 장르에 국가가 적극적인 개입을 하며 장려하고, 상까지 수여했다.  

 

 

 


66년 발표된 주요작품으로는 <말띠신부, 김기덕>, <오인의 건달, 이성구>, <초우, 정진우>, <여정, 강찬우>,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 이성구>, <예라이썅, 정창화>, <만추, 이만희>, <하숙생, 정진우>, <오늘은 왕, 김기덕>, <나운규의 일생, 최무룡>, <군번없는 용사, 이만희>, <목없는 미녀, 이용민>등이 있다 관객들의 환호를 받아낸 영화들은 <말띠신부>와 <초우>등 가벼운 코미디와 잔잔한 멜로물이었으며, 정작 평가 받아야할 명작인 <만추> -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은 "외국인들이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르히만을 자랑한다면 난 한국의 이만희의 <만추>를 이야기 하겠다."고 극찬했다. <군번없는 용사>는 지식인 관객들에 지지를 얻어냈으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별다른 반향을 얻어내지 못했다. 이만희 감독의 작품 <만추>는 후에 75년 <육체의 약속, 김기영>, 81년 <만추, 김수용>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됨으로서 원작의 위대함을 알린다.






1967년 영화계는 전해의 여파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맞이한다. <공처가 삼대, 유현목>, <학사 며느리, 박종호>, <이조잔영, 신상옥>, <육체의 길, 조긍하>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았으나 이는 당시 활동하던 160 여명의 감독 중 10여명의 의해 주도되는 영화판이라 아쉬운 감이 있었다. 신동헌 화백은 이때 <호피와 차돌바위, 신동헌>라는 애니메이션을 발표 또한 강태웅 감독은 전래동화인 <흥부와 놀부>를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주목을 받는 동시에 당시 어린이들을 영화관 앞으로 모았다. 또한 저널리스트 출신의 제작자 차태진은 일본 특수효과팀을 초빙하여 김기덕 감독을 필두로 하여 국내 최초의 특촬물인 <대괴수 용가리>를 선보여 흥행에 성공한다.




67년 발표된 그 외 작품으로는 겉으로는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내부가 썩고 곪아가는 현상을 자조적인 눈으로 바라 본 <어느 여배우의 고백, 김수용>, <메밀꽃 필 무렵, 이성구>, <산불, 김수용>, <막차로 온 손님들, 유현목>등 이른바 문예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는 당시 정권이 반공영화와 마찬가지로 우수 문예영화에도 외화수입쿼터라는 당근을 주는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69년 이 정책이 사라지자 문예영화의 제작붐은 사라진다.

 


문예영화 : 단순히 문학작품을 영화화 한 작품을 일반적으로 이렇게 불렀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67년엔 특히 문예영화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이는 한국의 60년대 후반 문학소설의 영화화가 심도깊게 이뤄지면서 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1968년 영화계는 멜로영화의 강세가 단연 돋보인 한 해였다. 66년 최고의 히트작인 <초우>, <초연>은 67년을 거치면서 진정한 멜로영화의 시작을 가져왔고 68년 7월에 개봉한 <미워도 다시한번, 정소영>은 국도극장에서 64일동안 37만 4천 명이란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신기록을 수립하는 동시에 멜로영화의 전성기를 가져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성관객들을 극장 앞으로 모여들게 한 멜로물의 힘이다. 그동안 반공, 문예, 사극, 코미디물에 밀려서 애매모호한 형태의 신파극으로 일관하던 멜로물은 <초우>, <초연>이후 당시 젊은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꿈과 사랑을 얘기하는 동시에 그녀들의 선배세대 즉 <미워도 다시한번>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멜로의 비극적인 여주인공에 의해 새롭게 완성된 것이다.



68년에 제작된 반공영화는 총 19편으로 멜로영화 주류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또한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에도 불구하고 한때의 유행을 노린 허술한 작품들이 많아 더더욱 관객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자리를 잃고 있었다. 

 


또한 68년에는 당시 동남아시아를 휩쓸던 홍콩영화의 영향을 받은 액션영화들도 상당 수 선보이게 되는데 <유랑의 검호, 김시현>, <풍광객, 임원식>등이 있었고 이런 액션영화들은 계속 젊은 남성관객들의 지지를 받으며 인기를 이어간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시대극 액션영화라고 분류가 되는데 역사극의 옷을 걸친 그야말로 국적불명, 역사적 근거가 전무한 창작 오락영화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인기를 모은 코미디영화 장르에서는 <남자 식모, 심우섭>, <속 팔도강산, 양종해>이 문예영화로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 최하원>, <카인의 후예, 유현목>, <장군의 수염, 이성구>, <여자의 일생, 신상옥>등이 흥행에 성공한 작품들.

 


68년 최고의 코드는 단연 '여성'이다. 이는 문예영화로 분류되는 신상옥 감독의 <여자의 일생>과 최고의 히트작인 <미워도 다시한번>에서도 잘 나타났다. 혼외정사를 저지른 여자에 대한 도덕적인 비난과 처참한 상황에 놓인 여자에 대한 동정심과 연대감이 여성관객들은 극장으로 이끌었다. 또한 김기영, 유현목, 정진우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여.여.여>는 68년 한해 불어닥친 여성영화 열풍에 대한 나름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주며 그 해를 마무리한다.

 


1969년은 한국영화 최고의 해로 기억된다. 총 229편의 영화가 제작되며 일본에 이어 아시아 영화 최강국으로 성장한다. 서울의 헐리웃이라 불린 충무로에는 그야말로 활기가 넘쳤다. 현대문명 사회에 소외된 어린이들이 한 교사의 노력으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오게되는 설정에서 출발하여 동심이 겪는 신문화의 희비극을 담은 유현목 감독의 <수학여행>은 아직 '서울'이란 낯선 땅에 미지의 동경을 꿈꾸던 관객들의 입맛에 맞아 흥행에 성공했다.

 


황순원의 소설 <독 짓는 노인>이 최하원 감독에 의해 문예영화로 만들어지고, 59년작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김 기(이름이 외자다.) 감독에 의해 리바이벌 된다. 또한 56년 문제작 <자유부인> 역시 강대진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 된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모윤숙이 쓴 <렌의 애가>가 김기영 감독에 의해 각색, 해석 되어 영화화 되었다. (시집을 영화로 각색한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다.)

 

 

 


6. 25전쟁 때 한 성직자가 성당 지하실에 감금되고 성직자를 방패삼은 북한군, 추적하는 한국군들과의 심리전을 담은 <지하실의 7인>은 마지막 반공영화의 이색적인 반향을 제시했다. 지난해의 멜로붐을 그대로 이어간 것이 69년 영화계라 할 수 있으나, 또 이색적인 것은 액션영화의 상승세다. 김기영 감독의 <렌의 애가>를 시작으로 <별은 멀어도, 홍성기>, <속 미워도 다시한번, 정소영>등 멈추지 않는 멜로영화의 행진은 계속되었고 <팔도 사나이, 김효천>, <암살자, 이만희>, <북경열차, 권철희>, <재생, 강대진>등의 액션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어 인기를 모았다. 신상옥 감독은 <이조여인 잔혹사>를 통해 당시의 영화계 여성 풍속도를 은유적으로 꼬집었다.

 

 








1960년대 영화약사를 정리하며



전후 황폐해진 사회분위기를 짙게 반영하던 60년대 초반 모더니즘,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주의 영화들은 60년대 말로 가면서 그 힘을 잃는다. 이는 당시 군부의 문화말살, 국민들의 의식권리를 박탈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다. 국민을 도덕적으로 계몽한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문화, 예술인사들의 창작권리를 박탈하고 그나마 작가주의 성향이 강했던 감독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일방적인 통제와 금기로 영화인들의 의욕을 꺾어버린다. 또한 당시 젊은세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60년대 후반에 선보이는 저질영화들, 반공영화들 제작으로 정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암울한 사회를 대변하듯 80년대말까지 그 통제가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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