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 홍범도 1920년 6월 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왕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독립군의 연합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이끈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안무(安武, 1883~1924)가 이끈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 ?~1945)이 이끈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와 한경세(韓景世)가 이끈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 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北間島)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 5월 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 6월 4일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 강양동(江陽洞)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다음날 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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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기 | 주요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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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 3.1운동 이후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이 결성되어 무장 항쟁이 활발히 전개. | 1919년 4월 | 박장호, 조맹선 등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 | 1919년 5월 | 남만주 서간도에서 서로군정서가 결성. | 1919년 8월 | 홍범도가 자신이 이끌던 의병을 중심으로 결성한 대한독립군으로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으로 진공 작전을 펼쳐 독립군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는 계기로 작용. | 1919년 11월 | 지린성 옌지, 허룽, 왕칭의 독립운동 대표들이 모여 대한국민회(간도국민회) 결성, 산하에 국민회군을 두고 안무를 대장으로 활동. | 1919년 12월 | 서일을 중심으로 대종교도들이 만들었던 중광단을 모태로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결성. | 1920년 2월 | 대한청년단연합회, 독립단, 한족회 등의 단체가 통합되어 임시정부 직속 광복군사령부 결성. | 1920년 5월 | 한국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공 활동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만주 군벌인 장꿔린을 압박해 독립군을 탄압하는 한편 독자적인 독립군 토발 작전을 계획. | 1920년 5월 3일 | 독립군 최진동의 근거지인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등 5개 독립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참석한 연석회의가 열림. | 1920년 5월 28일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 1920년 6월 4일 | 박승길이 지휘하는 대한신민단 소속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에 진입해 일본 순찰소대를 습격. | 1920년 6월 7일 | 새벽 2시, 봉오동 인근 후안산에서 독립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 봉오동 주변 산에 매복중이던 독립군의 총공격에 3시간 가량 응사하다가 후퇴. 일본군 150여 명, 독립군 수 십명의 사상자를 내며 상황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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