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하고 의롭게 사는 자에게 온갖 명예와 부귀가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현실세계에서는 그 정반대 현상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청백리라고 해서 승진이 수월하기보단 동료들의 눈총을 받기가 일쑤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학자가 탄압을 당하기도 한다.
갖은 술수를 써서 돈을 긁어모아 엄청난 부를 모은 사람이 허다하고(예컨대, 한국의 재벌들은 부동산 투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문어발식 확장으로 유망한 중소기업을 희생시켰는가), 일단의 정치 군인들은 한때 모든 민주역량을 군화발로 말살하여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어쩌면 명예와 부만을 쫓다보면 선도 악으로 변하고 정의도 불의로 바뀌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현세의 선과 악을 자(尺)로 하여 내세의 천당과 지옥으로 심판하는 이미지를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한탄도 선이 대접 못 받는 이미지에 불만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는 내세에서보다 현세에서 악은 징벌을 받고 선은 칭송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래서 TV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 권선징악적인 결말에 이르게 되면 통쾌한 기분을 만끽한다. 죽도록 고생하다 보면 하늘도 무심치 않겠거니 희원해 보기도 한다.
진실된 인간이 그에 걸맞는 대우는커녕 핍박을 받을 때 과연 진리는 추구할 만한 것인지 의문이 들 수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사학자인 사마천(司馬遷)은 그 일생이 기구한 만큼 하늘을 우러러 그 참된 뜻을 피눈물로 호소한 바 있다.
한무제의 천한(天漢) 2년(BC 99)에 태사령(太史令 -조정과 황실의 문서를 기록하는 기관의 책임자)이었던 사마천은 이른바 ´이릉(李陵)의 화(禍)´에 의해서 차마 견딜 수 없는 궁형(宮刑)을 받고 남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여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청렴결백하고 용맹 강직한 무장 이릉이 불과 5천 명의 군졸을 지휘하여 흉노의 수십만 대군과 용전감투하다가 천한 2년에 중과부적으로 부대는 전멸하고 자신은 인사불성에 빠진 채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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