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은 우선 날씨가 화창해서 좋기도 하지만, 바깥에서의 활동도 많고 챙겨야할 기념일도 많으니만치 분주한 달이기도 하다. 오월의 여러 기념일 중에서 군인들이 설친 날들만 빼면 모두가 이 날뿐만 아니라 일 년 내내 새기고 감사해야할 뜻 깊은 날들이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그리고 부처님 오신 날.
별스런 요직에 있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도 덩달아 마음이 바빠져 뉴스는커녕 꼭 챙겨 보리라던 <불교신문>도 건성건성 볼 따름인데, 오월 어느 날 배달된 불교신문의 한 모퉁이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그래,
당좌에 앉은
한 쌍의 풀무치다
당목이 아찔하게 밀려오고 있는데도 머언 산 단풍을 보며 흘레붙은
저 풀무치.
이걸 보고는 ‘참 멋진 시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보다도 더 감탄한 것은 이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바로 저 당좌撞座(한국 범종의 종을 때리는 부분, 흔히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를 더엉덩 치는 통나무를 무엇이라 부르는지가 궁금했었는데, 그 당목撞木이란 전문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작품에 아로새긴 그 시인의 문인답지 않은(?) 전문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의 일이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더는 되새김 않고 사무실 한쪽에 신문을 고이 접어놓았는데, 아는 선배가 어느 날 들렀다가 바쁜 척하는 꼴에 밸이 꼴렸든지 아니면 무료한 지 신문더미를 헤치다가 불쑥 물었다.
“이 시조 참 좋제?”
“어! 그거 현대시가 아니라 시조였어요?”
“그런데 시도 좋지만 제목이 쥑인다.”
“제목이 뭐길래...”
“근황이라네, 근황.”
“정말이요?”
비로소 그 시조뿐만 아니라 작가와 제목과 그 밑의 홍성란 시조시인의 작품평까지 읽게 되었다. 이 시조를 지은 이는 이종문 시인이었고, 시평詩評은 이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