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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대중문화 개방 21년에 부처
서현마미 2019-08-24     조회 : 244

지난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의 파란만장했던 정치 이력뿐 아니라 이를 가능하게 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혜안을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가 일본의 팽창 야욕을 우려하면서도 과거사 사과와 한·일 양국 양심세력 간 연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는 점은 오늘 양국이 겪고 있는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놀라운 연관성과 예지력을 보여준다. 박정희 유신 체제에 맞서 일본에서 망명 투쟁을 하던 1973년 4월, 그가 친필로 작성했다는 메모에서, “경제력, 팽창, 재군비, 핵무장, 대국야욕, 그들은 지배냐 종속밖에 모른다. 연결될 것인가?”라고 적은 문장(경향신문 2019년 8월14일자)은 하나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러한 정치인의 예민한 정세 판단 능력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힌 외교적 문제를 풀거나 상대와의 긴장을 해소하고 전향적 계기를 마련했던 예는 역사적으로도 축적되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전 일본 총리와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알려진 21세기 한·일 공동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복잡한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 관계로 반전시켰다. 국민의정부 시절을 외환위기 극복뿐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상 한·일관계가 가장 우호적이며 호혜적이었던 시절로 많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일례로 이전 군사정권에서는 경제성장을 목표로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그것이 동등한 것이라 보기 어려웠고, 이후 문민정부로 일컬어지는 김영삼 정부 때는 일본의 과거사 반성 기조가 역행하며 한·일관계가 악화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두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대중문화의 개방으로 한·일 문화교류를 활성화하고 오늘날 한류로 총칭되는 한국 대중문화 열풍의 단초를 마련한 것도 김대중 정부이다. 그 시절 국내의 거센 반대 여론과 전문가들의 우려에 반해 내린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정치적 결단이 현재 한국 대중문화의 전 지구적 확산의 출발점이 되었다. 1998년 당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반대해 수차례 대책마련 촉구집회가 열렸고 제2의 일제강점기가 올 지도 모른다며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일례로 한 방송에서 이어령 선생은 일본 문화에 대해,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에 비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진단했다. 가령 미국 서부영화의 경우, 문화적으로 이질감도 크고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 같은 큰 키의 백인들이 비록 선망이나 콤플렉스의 대상이 될지언정,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기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반면,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나 에로물들은 한·일 간 오랜 역사에 기인하는 문화적 친연성 혹은 근접성으로 인해 대중, 특히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과 달리 일본 대중문화 전면 개방 후 2000년대 들어 오히려 한국드라마 <겨울연가>와 K팝의 초창기 버전인 가수 보아, 그룹 동방신기 등 한국의 대중음악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J팝과 게임 등이 유입되어 일정한 팬덤을 형성하게 된 것도 사실이나, 한국 대중문화의 일본 내 수용과 영향과 비교할 때, 그러한 우려는 기우였음이 증명되었다. 여기에서 강고해 보이는 경제력이나 자본, 정치적 힘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거나 때로 이를 극복하거나 보완하는 문화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백범 김구의 높은 문화의 힘을 강조한 아름다운 문화강국론에도 등장하는 언술이다. 물론 이는 후대의 일부 문화연구자들에 의해 문화가 국가주의와 공모를 통해 도구화된다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한 선각자적 지도자의 혜안이 상당한 수준의 현실 반영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이를 부정하거나 이의 제기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화의 힘은 만족이나 중단을 모르는 경쟁과 팽창 메커니즘을 작동원리로 하는 협량한 일국적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창의적으로 사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한·일 간의 정치적 긴장 해소와 정치 지도자(아베)의 오판을 극복하고 양국 시민들이 새로운 관계와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도 바로 문화의 힘이 아닐까.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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