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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없으세요?
아린아린이 | 2020.03.11 | 조회 261 | 추천 1 댓글 1

초가을 같은 날씨에 강바람 같은 바람이 불고 있는 오월의 마지막 일요일. 내 방의 남쪽 창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남산타워에 오색불이 밝혀지고 어슬어슬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 서울 시민 모두가 어디로 다 가버렸는지 종로며 인사동 일대 는 텅 빈 듯 강바람 같은 바람소리만 기묘한 음향으로 유리창에 부딪쳐 온다.

˝정도600년 다시 태어나는 서울˝ 이라는 플래카드를 시내 어디서건 쉽게 만날 수 있어 별 대단한 사실도 아닌데 나는30년 이상 서울특별시의 시민으로 살고 있음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저녁 어스름에 인사동 거리의 화랑, 전통찻집, 골동품가게들을 기웃거려 보는 여유로움, 이조시대, 고려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서 삼국시대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한 역사의 거리 문화의 거리 인사동.

책상 앞에 대여섯 시간 줄창 앉아 있는다고 해서 기발한 문장이, 오월달에 신록 우거지듯 가히 상상도 못할 엄청난 기세로 터져나올 기미도 없는 듯 하니 나는 다리운동도 할겸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인사동 주변에서 생활해온 덕분에 나는 어디에 가면 맛깔스럽고 깔끔한 차를 마실 수가 있는지 알고 있다.

삽작문 같이 생긴 출입구에 달아놓은 종소리를 들으며 옹색하고 위태한 층계를 올라가면 새가 풀풀 날아다니는 전통차에 한과를 곁들여 주는 찻집과, 값은 비교적 고가여도 순 한국식의 슝늉 까지 즐길 수 있는 돌솥밥집을 나는 구석구석 알고 있는 셈이다. 마음 터놓을 진실한 벗이 찾아온다면 한번 가보아야지 하고 점찍어 놓은 ˝바람 부는 섬˝ 같은 멋쟁이 이름을 붙인 노래방하며, 은밀한 정담도 나누고 영양가 높은 바닷생선을 즐길 수 있는 고급일식집과 그리고 D여대 평생교육원 캠퍼스의 그림과 조각으로 분위기를 살린 카페의 산책로도 제격이다.

걷다가 싫증나면 오렌지맛의 사탕을 한 알씩 입에 넣고 우지직 씹어먹는 맛도 괜찮은데 나는 슈퍼마켓에 들려 울릉도 오징어 몇 마리 사가지고 내방으로 복귀한다. 썬파워의 외소한 불꽃에 울릉도 오징어 한 마리를 구워서 땅콩과 함께 먹으며 나는 쓰는 작업에 몰두한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건설업에 종사하는 상처한 중년 가장의 심정 묘사가, 행여 염세나 비관 쪽으로만 강조된 부분은 없는가 하면서 읽고 쓰고 고쳐나간다. 마지막엔 꼭 한마디 변영희 야그 잘 이끌어간다라는 자찬까지 곁들이는 동안 창 밖은 완전한 검은 장막에 휩싸인다. 서울의 밤이 멋있군. 아니지 밤이란 항상 아름다운 법이지. 도시의 밤 못지않게 풀벌레 우는 시골의 밤도 오염 안된 투명한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빛과 함께 더없이 아름다운 법이지 하면서 나는 문득 행복을 느낀다.

˝사춘기는 소나기와 같습니다. 억수 같은 빗속에서 흠뻑 젖어 방황하는 소녀들에게 이 책은 투명한 유리우산이 될 것입니다˝ 라는 비버리 클리어리 여사의 소설<오렌지 향은 바람을 타고>가 재미있게 읽히고 로버트 제임스의<메디슨카운티의 다리>도 썩 근사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알았다. 지금까지 그가 걸었던 인적드문 해안의 작은 발자국들의 의미를. 한번도 항해를 떠나본적이 없는 배에 실린 비밀스런 화물의 의미를. 황혼녘 도시의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는 그를 커튼뒤의 참문을 통해 바라보는 눈동자들의 의미를....˝ 사진작가 킨케이드와 프란체스카의 나흘간의 사랑 이야기.

흔히 미국문화를 생각할 때 갖게 되는 폭력, 성, 마약 같은 선입견을 배제하고 정화시키는 듯 이들 미국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행복감은 점점 고조되어 간다. 두눈의 혹사가 가중되면 나는 읽고 쓰는 일을 잠시 중단하고 눈을 감고 선정에 든다. 팔도 어깨도 목도 많이 아프지만 눈의 피로에 비하면 아직 참을수 있다.

˝따르릉˝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전화벨소리. 선정이란 정지이며 침묵인 것을,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몰아와 삼매의 경지이며 깊은 환희인 것을 한순간에 깨뜨리는 소리. ˝네˝ 차분한 내 응대에 화살같이 예리하게 꽂히는 목소리. 주제는 ˝애인 없으세요?˝ 이다. 진작부터 나에게 꼭 한번 던져보고 싶은 질문이었다고 한다. ˝애인? 애인이 뭔데?˝ 어눌한 내 답변에 이어 ˝애인도 없이 어떻게 글을 쓰세요?˝ 애인이 무슨 글쓴는 사람들의 필수품쯤으로 인식되는 것인양 대수롭지 않게 얘기한다. 전화를 끊자 나는 가부좌를 풀고 창 밖으로 눈을 돌린다. 분홍, 빨강, 노랑, 청색, 하양의 불빛들과 대학로 저쪽 산동네의 개성없고 빈약한 백열등 불빛에서 소리없이 밤이 깊어가는 모습을 본다. 내 인생의 석양을 바라보듯 관심있게.....

저녁 늦은 시간에 웬 애인타령은? 하는 의문이 쉬지 않고 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어떤 의도로 그런 전화를 했을까. 오래 전 택시기사한테 들은 얘기인데 요즘여자들 애인 있어요? 가 인사라나, 남편 아닌 남자친구를 가진 여자가 많다고 한다. 그 택시기사의 얘기가 얼만큼 현실에 근거를 둔 것인지는 모르지만 택시기사도 신문기자나 경찰관 못지않게 세태에 민감한 직종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TV에서 본 ˝주부의 외도˝라는 심야프로를 상기했다. 엄숙이 아닌 근엄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에게 쉽게 애인 있느냐고 물어올 정도로 지금 우리사회와 가정은 휘청거리는 것인가 하여 가지각색 불빛으로 빛나는 서울의 야경이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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싼타오 | 추천 0 |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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