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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그때 부케를 대신했던 송죽 헬프레인 | 2011.07.24 | 조회 10,392 | 추천 61 댓글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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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쟁통에 남해에서 찍은 부모님 결혼사진 일이 있어 내려간 고향집에서 모처럼 앨범을 뒤적거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4남 2녀, 우리 가족사의 첫 출발이 된 부모님 결혼식 사진이 새삼 눈길을 당긴다. 두 분이 결혼한 지 6년만에 큰누나를 갖게 됐고, 이후 2년 터울로 형제를 낳았다. 그리고 7살이나 아래인 늦둥이 막내를 끝으로 지금의 가족이 되었다. 앳돼 보이는 두 분의 모습이 담긴 결혼식 사진. 추억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분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그 해에 결혼하셨다. 무척이나 오래 전 일인데다 ‘기념일’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터라, 그냥 가을 어느 날로만 기억하고 계셨다. 그 때 그 시절이면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분이 결혼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던 것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장이 부산·경남만은 비켜갔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남해라는 조그만 섬 마을은 전쟁이 가져다주는 참혹함은 다소 덜 느끼고 지나갈 수 있게 했다. 두 분은 그 해 봄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뜻밖에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두 분의 결혼식 역시 한국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물밀 듯 내려온 인민군은 남해 읍내에 주둔했다고 했다. 남해읍내에 살았던 아버지는 인민군의 주둔으로 인한 미군의 폭격을 피해 마땅한 피란처가 없어지자 당시 어머니가 사는 동네의 어머니 친척집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결혼식 전 어머니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지가 인민군을 태우고 삼팔선 근처까지 다녀오신 일이다. 당시 아버지는 운전을 하셨다.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는 상황을 맞이하자 한 인민군 장교가 아버지에게 후퇴 차량의 운전을 요구한 것이다. 결혼을 약속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인민군을 태우고 삼팔선 근처까지 갔고, 아버지는 용케 다시 돌아오셨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경위를 알 순 없지만, 어머니 말씀으로는 인민군이 아버지를 돌려 보내주었다고 했다. 이어 인민군이 물러나고 한국전쟁의 전장이 부산·경남을 떠나가자 두 분은 곧바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했다. 그렇게 두 분이 맺어져 현재 우리 가족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당시 결혼식은 일제 잔재가 남아 전통과 서양식 결혼풍습이 뒤섞인 형태였다. 한복을 입고 면사포를 두른 것이 그것이다. 어머니는 당시 결혼식에서 족두리에 연지 곤지를 찍은 사진도 찍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진은 없다. 어머니 손에 들린 것은 송죽이라고 했다. 부케를 대신한 듯했다. 두 분에게는 우여곡절 끝에 이룬 결혼, 우리 가족에게는 생의 출발점이 된 사진, 볼 때마다 새록새록 정겹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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