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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 |||||||||||||||||
1970년대 단발머리 여고생 임예진 고스란히 | 2011.09.16 | 조회 33,953 | 추천 141 댓글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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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스포테인먼트 ㅣ 이명구 임근호기자]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틀렸다. 제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해도 의지만 있다면 두팔을 날개 삼아 다시 날 수 있다. 배우 임예진처럼 말이다. 배우 임예진(46). 1970년대 전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한 단발머리 여고생이었다. 요즘 표현을 빌리면 그녀가 진정 '국민 여동생'이다. 수많은 학원물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도맡으며 전국민의 '동생'으로, '누나'로, '애인'으로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임예진을 떠올리면 언제나 유쾌하다. 어디 하나 구김없이 곱게 세월을 머금었다. 마치 고생의 '고'자도 모를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임예진은 아니라고 손사레를 친다. 그녀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고난의 시간이 있었단다. 앨범토크 세번째 주인공 임예진을 만나 데뷔 30년의 일기를 들추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원래 교복하면 임예진이었다. 원조 국민 여동생 아닌가. "지금으로 부터 30여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여학생 취향의 드라마가 한참 인기였다. 방송국에서는 실제 여학생을 캐스팅했고. 그 또래 배우를 찾다보니 내가 운좋게 뽑혔다. 당시 나는 '여학생'이라는 잡지의 표지모델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여학생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거의 휩쓴 것 같다. - 학교에서는 반기는 분위기였나. "그렇진 않았다. 무학여고를 다녔는데. 70년대만 해도 연예 활동을 특기생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출석일수를 맞춰야 졸업이 가능했다. 그래서 촬영하랴 수업들으랴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선생님들은 연예 활동을 하려면 특히 모범이 되야 한다면서 얼마나 엄격하게 야단을 치시는지. 물론 점심시간때 몰래 기념사진 하나 찍자고 말씀하시는 아빠같은 선생님도 있었다." - 그럼 여고생의 상징은 임예진. 남고생의 상징은 누구였나. "내가 여고생을 맡았을 때, 남고생은 주로 이덕화씨와 전영록씨였다. 전영록씨와는 6~7편 정도 촬영했고, 이덕화씨와는 절반 이상을 찍었다. 사진은 전영록씨와 출연한 영화 '너무 너무 좋은거야' 촬영장이다. 저 교복이 실제 무학여고 교복이다. 이덕화씨와는 그 유명한 '진짜 진짜 미안해', '진짜 진짜 잊지마', '진짜 진짜 좋아해'다." - 여고생물의 내용은 대부분 남고생과의 사랑인가. "물론 여고생 드라마라고 해서 남학생과의 이야기만 다룬 건 아니다. 부모님과의 가족사랑을 다룬 것도 있고, 선생님을 짝사랑을 소재로 삼은 영화도 있었다. 내가 76년도에 출연한 영화 '여고졸업반'은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때 선생님 역을 맡은 분이 바로 이정길 선생님이다." - 그럼 여고생물 말고 다른 영화는 안찍었나. "첫 영화는 여학생이 아니었다. 비구니였다. 중학교 2학년때 '파계'라는 영화를 찍었다. 테헤란 영화제에도 출품된 작품이다. 그때 삭발을 했는데. 사진을 보니 삭발 후 조금 자란 모습이다. 원래 화장을 잘 안하는데 아마 잡지 촬영 때문에 립스틱을 바른 것 같다. 어쩜 저렇게 어색한지." - 역시 임예진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이덕화다. 70년대 중반 그 유명한 '진짜 진짜~' 시리즈를 히트 시켰는데. "이덕화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빠다. 정말 굉장히 의리있고 멋있는 남자다. 예전에는 현장에 늘 엄마가 따라 다녔다. 엄마가 혹 자리를 비울때면 덕화오빠 손을 꼭 잡고 '나 없는 동안 우리 예진이 부탁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덕화오빠는 내게 흑기사 같은 존재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나타나 해결해주곤 했다. 스캔들? 상상할 수도 없었다. 오빠에게 난 그저 8살 어린 막내 여동생 정도…."
-출연료가 궁금하다. 당시 개런티는 어느정도? "76년 영화 '여고졸업반'을 찍을 당시 20만원을 받았다. 그러다 최초로 개런티 100만원을 넘어섰다. 당시 언론에서 '개런티 100만원 시대'를 열렸다고 화제가 됐었다. CF를 하면서는 더 많이 받았다. 78~79년도에 태평양 화학 전속 모델을 했는데. 그때 모델료가 1300만원 정도 됐다. 당시 1300만원이면 집 한채 가격이다. 엄청난 돈이었다" - 원래 화장안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화장품 모델이 됐나. "요즘 쌩얼이 유행이라고 했나. 내가 정말 원조 쌩얼이었다. 심지어 TV 녹화때도 맨얼굴로 찍었다. 때로는 스킨톤이 옆사람과 안맞아 다시 찍기도 했다. 하지만 화장품 모델은 다른 의미다. 상징성이다. 당시 CF계에 '빅3'가 있었다. 태평양 화학, 한국 화장품, 해태제과. 그 중 태평양 화학이 최고다. 화장 안한다고 화장품 모델을 안할 수 있나." - 그럼 화장품 모델로 활동하면서 여고생 이미지를 완전 벗은건가. "1979년. 대학생이 된 뒤 이미지 변신을 위해 처음으로 성인영화를 찍었다. 신성일 선생님과 '땅콩 껍질 속의 연가'를 찍었다. 그 때 정말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괴전화가 걸려오고. 나 뿐만 아니라 신성일 선생님, 이원세 감독님도 팬들에게 질타를 당했다. '어떻게 순수한 여고생 소녀 임예진과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있냐'는 항의가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모 주간지에 '임예진 몸값 300만원'이라는 기사가 표지에 깔리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당시 임예진 출연료가 300만원이었다.) - 왜 팬들은 임예진을 만년 소녀로만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내가 평생 교복만 입고 나오길 바란 것 같다. 순수한 여고생으로 남길 원했다. 비단 '땅콩 껍질 속의 연가' 뿐 아니다. 유인촌씨와 '알뜰가족'이라는 드라마를 찍었는데 그 때도 원성이 대단했다.난 유인촌씨 아내 역으로 출연했다. 한데 사람들이 '집나온 여고생을 신부로 앉히면 어떻하냐'며 방송사를 세차게 비난했다. 결국 드라마는 조기종영됐다. 그때가 80년이었고,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신혼부부 역할 조차 비난 때문에 못했다. -8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꽤 오랜 공백이 있었다.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팬들은 변신을 용납치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나 학원물만 찍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방송사에서 내 이미지에 맞는 드라마만 제작할 수 있는 현실도 아니고. 아역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보니 성인배우로 도약하기에 힘이 부쳤다.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 처음부터 스타였다. 그럴 경우 한번 슬럼프에 빠지면 극복하기 어려울텐데. "사실 나는 연기에 대한 큰 애정은 없었다. 데뷔시절을 떠올리면 힘들었다는 기억이 더 많다. 그래서 더 쉽게 슬럼프에 빠졌는지 모른다. 그때 내게 멘토같은 역할을 해준 분이 바로 윤여정씨다. 언니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니가 배우라는 직업을 택했다면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베푸는 것도 중요해. 언제까지나 사랑받는 주인공만 할래? 그토록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는 사랑을 나눠줘야지. 배우는 어떤 역할이든 해낼 수 있어야 배우야. 넌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고민하는거야. 헝그리 정신이 없는거지.' 그랬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다. 대신 모든 변명을 팬들에게 돌렸다. 여정언니를 만난 뒤 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고 '아역'에서 '성인' 배우로, '가짜'에서 '진짜'배우로 거듭났다. 그리고 마침내 강남길씨와 호흡을 맞춘 '달수 시리즈'에서 서민아내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냈다며 호평을 받았다." - 요즘은 MBC 아침 토크쇼 '기분좋은 날' 진행을 맡아 MC로서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MC가 처음은 아니다. 대학교 2학년때 이택림씨와 '영일레븐'을 진행했다. '영일레븐'은 당시 개그맨의 등용문이었다. 그때 '영일레븐'을 통해 데뷔한 개그맨이 서세원, 이경규, 이홍렬, 김형곤씨 등이다. 대학가요제도 4년동안 MC를 맡았다. 2회 대학가요제 때 심수봉씨가 나왔고, 배철수씨가 그룹 '활주로'로 상을 받았다. 이후 FM 라디오를 7년 정도 했다. 그때 경험들이 '기분좋은 날'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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