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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박물관
주막 | 조선풍속사진
바바이 | 2012.03.03 | 조회 783 | 추천 9 댓글 0








주막이란 시골 길가 또는 도심 변두리에서 술과 밥을 팔거나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집. 주막집·탄막·주사·주가·주포라고도 한다.


 


주막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할 수 없으며 신라 때 김유신이 드나들었다는 경주 천관의 술집이 효시라 할 수 있으나 이밖에 고려 숙종 때 주막이 생겼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 성종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숙종 7년(1102)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개경에 좌우 주점을 두고 각 주와 현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과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나라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사진1#


 


 


거리의 주막에서 요기하는 사람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에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교사원들은 세금과 역을 면제받고 술, 국수, 마늘, 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번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다. 주막(酒幕)의 막(幕)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다.




주막은 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다.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 소주가, 병주가, 주막, 목로주점, 내외술집, 모주가, 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주막은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도회지에도 많이 있어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이다. 대체로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는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이었다.


 

 


 


 


 


 #사진2#


 


한 나그네가 주막에서 요기하는 모습


 


 


조선시대에 주막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서울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오류동에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 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던 조령원·동화원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 한지와 죽산물·곡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으로 꼽힐 수 있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객주집·여각과는 달랐다. 기방은 기녀가 주로 돈 많은 양반들에게 기악과 함께 술을 팔았던 곳이고, 색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상품판매와 관련해서 번성했던 것 가운데 객주집은 행상인의 숙식과 상품의 중개나 위탁판매를 했던 곳이고, 여각은 행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사진3#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막도 변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는 내외주점, 거리의 주막, 색주가,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내외주점은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연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주점이었다.그 시절만 해도 남녀 사이의 내외가 엄격하던 실정이라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팔뚝집 혹은 내외주점이라 하였다.




거리의 주막은 막벌이 노동자를 위해 새벽녘에 거리에서 주모가 모주를 팔았다. 모주란 술을 걸러 낸 찌꺼기에 다시 물을 붓고 우려 낸 술이므로 주도도 낮았고 맛이 없었다. 모주의 안주로는 비지찌개를 끓여 팔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는 주막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승 맹사성이 고향 온양에서 상경하다가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주막에 먼저 들었던 시골 양반이 허술한 맹사성을 깔보고 수작을 걸어 왔다. 그는 ‘공’ 자와 ‘당’ 자를 말 끝에 붙여 문답을 해서 막히는 쪽에서 술을 한턱내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맹사성이 먼저 “무슨 일로 서울 가는공?” 하니, 그 양반이 “과거 보러 가는당.” 하였다. “그럼 내가 주선해 줄공?” 하니, “실없는 소리 말란당.” 하였다.

며칠 뒤 서울의 과거장에서 맹사성이 그 시골 양반을 보고 “어떤공?” 하였더니, 그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면서 “죽어지이당.” 하였다. 맹사성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색주가란 조선 세종 때 생긴 것으로 그때는 주로 명나라에 사신 가는 이들을 위하여 주색을 베풀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부류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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