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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장실 문화...정낭,변소,칙칸.....등 |
이사 |
2011-08-04 조회 : 140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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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명칭의 변천사
먼 옛날 우리나라는 변소를 '뒷간'이라고 불렀다. '뒤를 본다' 라는 말을 '똥을 눈다' 라는 순 우리말이다. 초대 국회 때 어느 의원이 손을 들어 발언을 신청한 뒤 ' 뒤 좀 보고 오겠다'는 발언을 해서 항간(巷間)에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된 적까지 있을 정도이다. 뒷간이라는 말 이외에는 '칙간(厠]間)', '정낭', '통숫간' 이란 말들도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사전(辭典)에서는 '칙간'은 강원도와 전라도 지방의 사투리이고, '정낭'은 함경도 지방의 사투리이며, '통숫간' 은 그냥 방언(方言)이라고만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풀이들 역시 부정확한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데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변소를 두고 뒷간, 칙간, 통수간 등의 용어가 고루 다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는 똥구당 혹은 똥구덩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또 통시 혹은 통싯간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통숫간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고루 쓰였던 말만 대충 꼽아도 뒷간, 칙간(厠間), 정낭, 통싯간, 똥 통싯간, 똥구당, 변소 등 여러 가지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변소를 가르키는 한자의 厠은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한자에서 원래 변소는 厠은 의 속자(俗字)로 우리나라에서는 '측'이라고 잘못 읽히고 있다. 변소의 뜻으로 '치', 기운다는 뜻으로 '칙'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씨는 지적한 바 있다.
절에서는 뒷간을 두고 '해우소(解憂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은 다솔사(茶率寺)에서 산골짜기에다 멀찌감치 오두막 한 채를 지어놓고 그것을 '해우정(解憂亭)'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굳이 그 뜻을 풀어보자면 뒤를 보는 일은 곧 근심을 푸는 일이니 해우정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 후 다른 절에서도 이 명칭을 받아들여서 해우소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서울 근교 북한산성의 상운사(祥雲寺)에 가면 뒷간 앞에 아름다운 탱화와 함께 '해우소'라고 쓴 간판을 붙여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비구니들만 있는 충남의 동학사 뒷간에도 해우실(解憂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뒷간에 이르는 다리 난간에 해우교(解憂橋)가 있다. '근심을 더는 방' 이라는 뜻의 이 이름들은 서양의 쉬는 방(rest room)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는다. 변소를 두고 하는 말들 중에 요즘 가장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말은 '화장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변소, 그리고 뒷간과 칙간이라는 말이 쓰인다.
해우소라는 말이 고상하기는 하지만 조작적인 느낌이 강하다. 뒷간이란 말은 사실 자연스럽고 알기 쉽고 우아한 편이기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써왔던 탓인지 약간 변냄새가 서려있는 느낌이다. 칙간은 뒷간만큼 우아한 느낌이 들지 않는 말이며 통숫간이라는 말도 토속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분뇨 냄새를 풍기는 말이다. '화장실'은 여성의 화장 행위를 비꼬는 듯도 하고 다소 조작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런대로 아직 변냄새는 그다지 스며 있지 않은 무난한 명칭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칙간의 유형
<한국 민족 문화 백과사전 designtimesp=1630>에 기록된 한국 측간의 유형을 보면 측간이란 대소변을 배설하는 장소로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집이나 시설, 뒷간, 헛간, 복수간, 통시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 중에는 혼자 사용하는 것과 여럿이 동시에 사용하는 것, 남녀가 따로 사용하는 것 또는 다른 시설과 하께 있는 것 등 그 용도에 따라 내칙(內?), 외칙(外厠), 중칙(重厠), 북수(北水), 목방(沐房), 세답방(洗踏房) 등으로 달리 이름지어 부른다고 되어 있다. 그 대략적인 유형은 다음과 같다.
노천측간의 형태로 시골집 담장 밖 한구석에 벽을 치고 독을 묻거나 제주도의 경우처럼 돌을 싸서 노둣돌과 대소변을 받는 부분을 구축한 것과, 헛간에 부설한 것으로 노둣돌을 놓고 퇴비를 만들 목적으로 풀이나 재를 쌓아 옆에 용변을 보도록 한 것 등이 있다. 또한 이층 칙간으로 아래층에 재와 퇴비를 넣고 위에서 용변을 보게 한 것이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헛간 구조 위에 이층 마루를 깔고 지붕을 구성하여 형편에 따라 이엉을 잇거나 기와를 얹었다.
바닥은 마루에 구멍을 뚫어 용변을 보도록 하였고 널빤지로 문짝을 달았다. 담장에 의지하면서 돌계단을 밖에 설치하여 갑자기 나타날 짐승에 대비하였는가 하면 헛간의 용도까지 겸했다.
절간같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지형을 이용하여 다락형의 측간을 짓되 건물을 크게 지어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게 했다. 전남 승주에 소재한 선암사의 뒷간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전용의 목적으로 쓰이던 것도 있는데 칸의 네모 반듯한 집을 담장 안 또는 담장밖에 짓고 윗쪽에는 판벽을 하여 기와로 지붕을 만들었다. 안채 뒷마당에는 내칙(內厠)을, 사랑채 밖에는 외칙(外厠)을 두었는데 마당보다 훨씬 두꺼운 판자로 노두를 하고 그 아래에는 저장용 공간을 만들어 수시로 수거할 수 있도록 시설했다. 신라시대 유물 중에는 큼직한 판석을 가공하여 노둣돌을 만든 것도 있다.
경주 첨성대 부근에서 발굴된 거대한 석조 탱크가 부설된 공중 측간은 충청도 유구에서도 유적이 발견된 바 있고 불국사에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수세식 변소도 물론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불국사 극락전 앞마당에 있었던 노둣돌은 사각의 돌(약 40×70센티미터 가량)의 중간에 배 모양으로 길게 파내고 (깊이 15센티미터 가량)앞쪽 뾰족한 부분에서 바깥으로 구멍을 관통시켰는데 돌로 만든 여자용 소변기가 아닌가 짐작된다. 용변후 물을 내리면 구멍으로 오물이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이 변기를 위한 칙간 즉, 북수간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목욕탕 겸용 측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내칙(內?)에 여인들이 뒷물할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복수간에 목욕통을 겸비한 것을 세답방이라고도 부른다. 끝으로 간이용 변기인데 매화틀이나 구이처럼 만든 나무통―통나무로 만듬―장군독 등을 툇마루 한쪽 끝이나 골방 밖에 설치하고 오줌을 눌 수 있도록 해놓은 것들이 여기에 속한다.
요강
이세상에서 가장 이쁜 도자기... 요강을 아시나요? 분뇨를 퇴비로 이용하던 농경 문화권에서는 되도록 후미지고 먼 곳에 칙간을 두어 분뇨를 배설하고 저장했다. 생리적으로 자주 배설해야만 하는 소변까지 칙간을 이용할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편리하게 이용해 온 간이식 변기가 바로 요강이라는 그릇이었는데, 중국에는 요강과 비슷한 수병이라는 소변기가 있었다.
농경 문화와는 깊은 관계가 없었지만 생활의 필요에 따라 유럽에서도 일찍이 일찍이 '볼타르' 나 '오마르' 같은 변기가 있어서 널리 이용되었다. 요강은 마치 작은 항아리처럼 생긴 것으로 그 위에 뚜껑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그 크기와 용량이 다양하고 모양은 밑이 둥글게 넓고 배가 볼록하여 넘어질 염려가 없었다. 재료의 종류도 유기, 청동, 청자, 백자 외에도 도기, 자기, 오동나무에 옻칠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궁중칙간과 변기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궁중에서 사용해온 뒷간에 대한 문헌은 아직 이렇다 하게 발견된 것이 없다. 현존하는 고궁의 설계도를 보아도 칙간은 없고 다만, 창덕궁 대조전에서 회랑으로 연결된 경운각 뒷편에서 유일하게 칙간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경운각의 모난 뒷칸은 당시의 욕실이고 그 옆의 작은 칸이 뒷간으로 쓰였다고 추측되는데 마루에는 배설구로 보이는 긴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마루에서 땅바닥은 약 70센티미터 높이의 공간이고 밖에 있는 문 두짝을 열고 보면 그 속에 7센티미터 가량의 네 바퀴(30×70센티미터)가 달린 끌개 한 대가 있다. 끌개 위에는 3센티미터 높이의 칠테가 둥글게 박혀 있는데 그 위에 배설물을 담는 그릇을 얹어 두었다가 밖으로 끌어내는 데 쓰여진 유물같이 생각된다.
대조전은 태종 5년(1450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전후에 소실되어 중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다시 불이 나서 1920년에는 경복궁 교태전을 그곳에 옮겨 개축(改築)하였다.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등 현대식 건축법을 도입한 개화기의 것이었으므로 그 이전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다. 다만 여러 개의 방과 구석 욕실과 뒷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짐작될 뿐이다.
길요강
매화틀을 이용하면 대소변 모두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요강 같은 간편한 변기도 함께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가(私家)에서도 작은 요강을 바지 속에 넣고 소변을 보았는데 하물며 임금이나 왕비가 겹겹의 아래옷을 다 벗어야 앉을 수 있는 매화틀에서 소변까지 보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조백관과 군병들의 옹위를 받으며 장거리를 행차하던 어가 속에서 상감의 생리적 현상은 역시 요강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가마 속에서 얼굴을 보일 수 없었던 왕비나 이에 버금가는 궁중의 귀인들 역시 요강 같은 그릇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 정확한 사료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광언 교수의<한국 민속지 designtimesp=1697>를 보면 일반 사가에서는 옛날 '길요강'이라는 것이 있어서 두루 이용되었다고 하니 상감의 행차에까지 이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뿐이다.
매화틀
프랑스의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이름난 17세기 베르사이유 궁전에만 궁인들의 화장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궁중 역시 궁신과 각급 궁인들의 칙간음 따로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원 으슥한 곳에 사대부집을 본따서 지은 연결당 행랑채, 마굿간 구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칙간이 제한된 수준의 사람만 쓰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궁중에 화장실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예의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던 시대 였으므로 궁중에서 방뇨했을 리는 없다고 믿어지기에 어떤 형태이든 대소변을 보던 장소는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감의 생활 주변에 칙간을 아예 없애야 할 이유로, 첫째는 사가(私家)와 같은 방식의 위생 시설을 궁중에 설치한다는 것은 왕의 절대 권위에 손상이 된다는 점과 뒷간의 위생적인 처리 방안이 여러모로 당시 기술로는 미흡했기 때문에 배설물을 즉시 땅에 묻거나 없애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착간은 없어도 변을 보는 그릇 또는 틀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매화(梅花)틀(매우틀)'과 '매화그릇(매우그릇)'이 바로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들은 창덕궁 대조전 경운각에서 발견되었다. 매화틀은 높이가 21센티미터, 너비가 39.5센티미터, 길이가 48.3센티미터 정도 되는 목제(木製)로 윗면은 장방형이며, 가운데 역시 장방형의 구멍이 파져있다. 또, 외곽은 엽문(葉紋)주단으로 폭신하게 입혀져 있고 아랫부분 양옆에는 발판이 있고 이 역시 엽문 주단으로 입혀져 있다. 이중 한쪽은 막혀 있지만 다른 한쪽은 터져 있다.
터진 면으로 변을 받는 '청동제 매화그릇'을 넣고 빼낼 수 있게 되어 있다. 틀의 규격이 작기 때문에 빼낼 수 있게 되어 있다. 틀의 규격이 작기 때문에 어린 왕자들이 쓰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보관하고 있는 청동제 매화그릇은 현존하는 매화틀에 맞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매화그릇은 큰 어른용으로 높이 12센티미터, 넓이 22.5센티미터, 길이 49.5센티미터의 선형(船形)으로 되어 있다. 매화틀 겉에 입혀진 주단의 무늬나, 직조와 나무를 접합시킬 때 쓰인 핀의 모양으로 볼 때 개화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제 매화그릇은 부식 상태가 꽤 심한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왕궁의 매화틀에 앞서 다른 매화틀이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짐작케 한다. 역대의 부유했던 상류층에서도 이런 형태의 변기를 모방하기도 하였는데 강릉의 선교장에 보존되어 있는 변기는 궁중의 매화틀과 매우 흡사하다. 이 변기가 매화틀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이 없다는 것인데 배변후 틀을 들어내고 받침그릇을 처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민속학자 김광언 교수에 의하면 궁중에서는 매화틀을 담당하는 '복이나인(지밀나인)'이 있어 매화그릇에 '매추'라는 잘게 썰은 여물을 담아 틀 안에 넣어 두었다가 귀인(貴人)이 쓰고난 다음 여물을 다시 덮고 그릇을 빼내어 처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프랑스 왕가의 의자식 변기(stool)와 매우 유사한 처리 방법이다. 왕이 쓰던 매화틀은 모두 세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침전에, 그리고 정사를 보는 곳과 신하는 만나는 곳에 하나씩 있었다고 하며 왕비나 왕대비는 각각 두 개씩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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