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과 표준어
방언(方言;dialect)이라는 용어의 한 용법은 표준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다시 말하면 비표준어라는 개념으로서의 용법이다. '방송극에 방언을 함부로들 써서 단'이라든가, '공직자가 방언을 써서는 안된다' 든가 할 때의 '방언'은 표준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방언이다. 이러한 개념으로서의 방언은 '사투리'라는 용어로 바뀌어 쓰이는 수가 많다. '충청도 사투리', '평안도 사투리'라고 할 때의 사투리는 대개 이러한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다. 이때의 방언이나 사투리는, 말하자면 표준어가 아닌 어느 시골의 말을 뜻하며, 나아가서는 표준어보다 열등(劣等)한 지위에 있는, 그만큼 세련되지 못하고 격을 갖추지 못한 열등(劣等)의 말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때의 방언 내지 사투리는 대개 한 고장의 언어체계 전반을 가리키기보다는 그 고장의 말 가운데서 표준어에는 없는, 그 고장 특유의 언어요소만을 일컫는 것이 보통이다. '사투리가 많아 못 알아듣겠다'라고 할 때의 사투리가 바로 그러한 용법으로 쓰인 경우일 것이다.
언어의 하위개념으로서의 방언
그러나 언어학 내지 방언학에서 '방언'이라고 할 때는 표준어보다 못하다든가 세련되지 못하고 규칙에 엄격하지 않다든가와 같은, 어떤 나쁜 평가를 동반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한 언어를 형성하고 있는 하위단위로서의 언어체계 전반을 곧 방언이라 하여, 가령 한국어를 예로 들면 한국어를 이루고 있는 각 지역의 말 하나하나를, 즉 그 지역
의 언어체계전부를 방언이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지역의 방언들은 표준어가 아니기 때문에, 또는 표준어보다 못한 언어이기 때문에 방언인 것이 아니라 한국어라는 한 언어의 하위류(下位類)들이기 때문에 방언인 것이다.
이 때의 '충청도방언'은, 충청도에서만 쓰이는, 표준어에도 없고 다른 도(道)의 말에도 없는 충청도 특유의 언어요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충청도의 토박이들이 전래적(傳來的)으로 써 온 한국어 전부를 가리킨다. 이 점에서 한국어는 우리 나라에서 쓰이는 각 방언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방언은 하위단위인 한국어의 변종(變種; variety)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방언의 크기
한 언어의 방언들은 대체로 애초에는 한가지 모습만을 가졌던 언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지역에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변화를 일으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모체(母體)로부터의 분화체(分化體)인 것이다. 이 언어의 분화(分化;differentiation, diversity)는 그 폭(幅)이 아주 커지면 아주 다른 언어로 갈리기도 한다. 가령 한국어와 만주어는 애초 알타이(Altai) 조어(祖語)로부터 분화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방언차 정도의 조그만 차이밖에 없는 사이였을 것인데 이것이 점차 커져서 드디어는 별개(別個) 언어로 분립(分立)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언어의 방언이란 이처럼 별개 언어로 될 정도의 큰 분화를 일으키지 않은, 적어도 한 언어로서의 공통점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의 분화만을 거친 분화체(分化體)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분화의 크기는 이 경우에도 일정하지 않다. 한 언어 안에서의 언어분화라 할지라도 여러 층위(層位)에서 갖가지 다른 이유로 갖가지 다른 크기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가령 같은 제주도 안이라 하더라도 한라산 북쪽과 남쪽의 말이 갈릴 수 있고, 또 같은 남쪽 지역이라 하더라도 산간지방과 해안지방 사이에서 다시 언어분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때 방언은 한 언어의 어느 크기, 어느 층위의 하위류(下位類)를 가리키는 것일까? 가령 한 언어의 제 1차 하위류(下位類)만을 방언이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방언을 이처럼 엄격하게 규정된 술어로 쓰는 일은 별로 없다.
즉 한 언어의 하위류(下位類)요 분화체이면 그 크기나 층위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 방언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주도 전역의 언어를 가리키는 '제주도 방언', 한라산 이남지방의 언어만을 가리키는 '남제주도 방언', 또 그 중 어촌의 언어만을 가리키는 '남제주도 어촌방언'등의 명명(命名)이 다 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한 개인의 말을 특별히 구별하여 지칭하고자 할 때는 개인어(個人語 ; idiolect)라 한다. 이는 방언이 한 개인의 말 정도로 작은 크기의 언어를 가리키는 용어로까지는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방언이 어느 크기 이하의 작은 단위는 가리킬 수 없다든가 하는 엄격한 제한은 없다. 한 군 단위의 언어를
가리켜 '경주방언(慶州方言)'이라 불러도 좋으며, 한 마을 단위의 언어를 가리켜 '석교리방언(石橋里方言)'이라 불러도 방언이라는 용어의 용법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방언'은 그만큼 쓰임이 자유롭고 용도의 폭이 큰 용어라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2. 지역방언(地域方言)과 사회방언(社會方言)
한 언어 안에서의 방언의 분화는 크게 두 가지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하나는 지역이 다름으로써 방언이 발생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요인들, 가령 사회계층(社會階層), 성별(性別), 세대차(世代差)등에 의해 방언이 갈리는 경우다.
지역방언(地域方言)
두 가지 원인 중 전자(前者), 즉 지역의 다름에 의해 형성된 방언을 지역방언(地域方言 ; regional dialect)이라 한다. 두 지역 사이에 큰 산맥이나 강, 또는 큰 숲이나 늪 등의 지리적인 장애가 있을 때면, 그러하지만, 이러한 뚜렷한 장 애물이 없더라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양쪽 지역 주민들 사이의 왕래가 어려워지고 따라서 두 지역의 언 어는 점차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행정구역이 다르다든가 시장권이나, 학군, 또는 교구 등이 다르다는 것도 서로의 왕래를 소원(疏遠)하게 함으로써 방언의 분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수가 많다.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든 이처럼 지리적인 거리로 인하여(다시 말하면 지역이 떨어져 있음으로써) 서로 분화를 일으킨 방언 각각을 지역방언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 '제주도 방언, 경상도 방언, 전라도 방언' 등으로 도명(道名)을 붙여 부르는 방언들이 이 지역방언의 전형적인 예이지만, '중부방언, 영동방언, 흑산도(黑山道) 방언, 강릉(江陵)
방언' 과 같이 이름의 방언도 역시 훌륭한 지역방언의 예들이다. 전통적으로 방언이라 하면 이 지역방언을 일컬을 만큼 지역방언은 방언 중 대표적인 존재라 할 만하다.
사회방언(社會方言)
방언은 지역이 달리짐에 따라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지역 안에서도 몇 개의 방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지역의 언어가 다시 분화를 일으키는 것은 대개 사회계층의 다름, 세대의 차이, 도는 성별의 차이 등의 사회적 요인에 기인한다. 이처럼 지리적인 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요인에 의하여 형성되는 방언을 사회방언(社會方言; social dialect)이라 한다. 사회방언은 때로 계층방언(階層方言; class dialect)이라고 부르는 수도 있는데 이는 사회방언이 여러 가지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형성되지만 그 중에서도 사회계층이 가장 중요한 요인임이 일반적인 데서 연유한다.
사회방언은 지역방언과 함께 이대방언(二大方言)의 하나를 이룬다. 그러나 사회방언은 지역방언만큼 일찍부터 방언학자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어느 사회에나 사회방언이 없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사회방언간의 차이는 지역방언들 사이의 그것만큼 그렇게 뚜렷하지 않게 때문이었다. 가령 20대와 60대 사이에는 분명히 방언차(方言差; 사회방언으로서의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전라도방언과 경상도방언 사이의 그것만큼 현저하지는 않은 것이 일반적이며, 남자와 여자사이의 방언 차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회계층간의 방언차는 사회에 따라서는 상당히 현격한 차이를 보여 일찍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어 오기는 하였다. 인도에서의카스트에 의해 분화된 방언, 미국에서의 흑인영어의 특이성, 우리 나라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양반 계층과 일반 계층 사이의 방언차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층간의 방언분화는 역시 어느 사회에서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어서 지역간의 방언분화만큼 일반적이지 못하고 따라서 최근 사회언어학(社會言語學; socialinguistics)의 대두에 따라 점차 큰 관심의 대상이 될 때까지는 방언학의 중심 문제가 되지 못하였다.
3. 언어와 방언
상호의사소통력(相互意思疏通力; mutual intelligibility)
방언은 언어의 변종들이며 그 하위류(下位類)이기 때문에 한 언어에 속하는 방언들은 그들 사이의 차이가 아무리 현저하고 크다고 하더라도 상호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크지는 않은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서 가령 한국어와 일본어, 또는 한국어와 중국어처럼 서로 다른 언어는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이들 두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방언과 언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흔히 상호의사소통력(相互意思疏通力; mutual intelligibility)을 든다. 말의 차이가 있는 두 다른 지역의 사람이 만나 서로 의사가 소통되면 두 지역의 말은 한 언어의 방언들이며, 그렇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그 두 지역의 말은 별개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소통 여부에 의한 언어와 방언의 구분 기준은, 때로는 그대로 잘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어 그리 강력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한 언어에 속하는 방언들이면서도 상호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할만큼 그 차이가 큰 경우도 있으며, 분명히 개별의 언어를 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자기 나라 말을 쓰면서도 의사가 자유롭게 소통되는 실례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예로는 흔히 중국을 든다. 표준 중국어인 북경 관동(官語)와 광동방언(廣東方言)은 같은 중국어이면서도 의사소통이 안 될 만큼 그 차이가 크다고 한다. 중국어는 크게 네 방언권으로 나뉘는데 위의 두 방언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네 방언권 사이는 어느 사이에서나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고 한다.
한 언어 안의 방언들 사이가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거리가 먼 사례(事例)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이태리에서도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제주도 사람끼리 하는 순수한 제주도 방언은 육지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렵다고 한다. 제주도 사람과 두만강 부근의 함경도 사람이 서로 만나 이야기할 경우의 상황이 아직 정확히 보고된 일이 없지만 이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진다. 결국 한 언어에 속하는 방언들간의 언어차가 늘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가벼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이미 말한대로 서로 다른 별개의 언어이면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그 차이가 크지 않은 예들도 널리 알려져 있다. 한 예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세 나라의 언어들은 각기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 있는 별개의 언어인데 이 세나라 사람들은 서로 제나라 말을 쓰면서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한다고 한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이러한 현상은 국경지대(國境地帶)에서 일반적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지대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들 지역에서는 이쪽 나라 말들이 저쪽 나라 사람들의 말을 쉽게 알아듣는다고 한다. 미국 내륙사람들과 멕시코 내륙지방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의사소통이 이들 국경지대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물론 국경지대에서는 상대편 나라 사람들과도 접촉을 자주 함으로써 두 나라 언어의 요소도 서로 오가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지만, 이들의 예가 언어간의 차이가 반드시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것이라는 입론(立論)의 한 반증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경지대라는 특수성은 있지만, 상호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작은 차이를 가지는 두 집단의 말은 한 언어의 방언들이라는 앞에서의 기준으로 보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의 영어와 멕시코어는 한 언어에 속하는 두 방언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이 한 언어일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국경을 사이로 미국 쪽의 말은 비록 멕시코어의 영향이 크다할지라도 영어임이 분명하고 멕시코 쪽의 말은 멕시코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언과 언어를 상호의사소통 여부만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과 국가
언어는 흔히 국가를 배경으로 하여 인식되는 일이 많다. 한 국가를 단위로 하여 그 안에서 한가지 표준어를 지향 하며 한가지 정서법으로 표기되는 말이면, 그 말들 사이에 다소간의 차이, 또는 상호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의 큰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한 언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중국어의 예의 방언들이 별개의 언어들로 간주되지 않고 중국어의 방언들로 간주되는 것은 이 까닭이다. 그들 방언은 모두 한자라는 동일한 정서법으로 표기되며 또 그 방언들이 지향하는 표준어가 있다면 그것은 표준중국어일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중국에서 쓰이는 여러 방언은 아무리 그 차이가 크다고 하더라도 중국어의 방언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의 문제도 이러한 기준에 의해 해결된다. 미국 쪽 사람들은 멕시코어의 요소가 많이 섞인 말을 쓴다 하더라도 영어정서법을 쓰며 또 표준영어를 지향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영어인 것이다. 다른 국경 지대에서의 두 나라 언어들도 그들이 각기 다른 국가, 다른 정서법, 다른 표준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비록 두
말이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가깝다 하더라도 각각 별개의 언어이며 결코 한 언어의 방언들이 아니라는 일반론이 성립한다.
언어와 방언을 이처럼 국가와 연관시켜 인식할 때 문제로 대두되는 몇 경우가 있다. 그 하나는 스위스 및 캐나다와 같은 경우다. 스위스에서 쓰이는 불란서와 독일어는 한 나라에서 한 국민들이 쓰는 말이라는 점에서 같은 언어의 방언들이라고 할 법하다. 캐나다에서 쓰이는 영어와 프랑스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들이 각기 별개의 언어임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면 무엇이 그 기준인가? 우선 이들이 상호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가까운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서법과 지향하는 표준어가 더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 스위스에서 쓰이는 프랑스어도 정서법은 프랑스 사람들이 쓰는 것을 따르며 파리의 표준어를 그 기간(基幹)으로 삼기 때문에 프랑스어
이다. 마찬가지로 스위스에서 스위스 국민이 쓴다고 하여도 독일어는, 같은 스위스 국민이 쓰는 프랑스어와는 별개의 언어인 독일어이다. 한 나라 한 국민이 쓰는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 예외적인 현상으로서 그 언어들이 한 국가 안에서 쓰인다고 하여 단일 언어는 아닌 것이다.
국가와 언어를 묶어 생각할 때 제기(提起)되는 다른 한 경우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에서 다 영어가 쓰이는 경우다. 나라가 다 다르니 각기 다른 나라에서 쓰이는 영어를 모두 다른 언어라고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영국 영어(British English), 미국 영어(American English)로 구분은 할지언정 이들
이 같은 영어임에는 틀림없다.
이때 이들을 같은 언어로 묶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국경지대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서 이들이 모두 상호의사소통이 가능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일한 정서법을 쓰고 있다는 점을 큰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의 표준어는 반드시 하나는 아니지만 표준어끼리의 차이가 이들을 다른 언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세한 것이어서 결국 거의 같은 표준어를 채택해 쓴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이 점에서도 이들은 한 언어로 묶인다.
결국 각 언어는 한 국가에 소속되는 관계에 있지만, 각각 다른 체계의 정서법과 표준어를 가질 때 그 독자성을 가지는 것이며, 방언은 이러한 언어의 하위류(下位類)들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소원(疏遠) : 1. 친분이 가깝지 못하고 멂. 2. 소식이나 왕래가 오래 끊긴 상태에 있음
정서법(正書法) : 말을 올바르게 적는 방법. 한 언어를 표기하는 바른법의 체계. 곧, 옳은 철자법을 말하는데, 그 조건으로 같은 말의 표기는 일정하여야 하며, 공중(公衆)이 사용하는 것이라야 하고, 귄위 있는 규범이 사전의 형태로 되어 있어야 함.
카스트 : 인도에서 내려온 엄격한 세습적 신분제도의 네 계급. 왕족이나 무인으로서의 크샤트리아, 승려로서의 브라만, 평민으로서의 바이샤, 노예로서의 수드라. 그 소속은 태어나면서 정해지며, 한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옮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직업, 통혼, 관습 등이 엄중히 규정되어 제약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