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게네 글로손)
1) 정의 (관련 성구: 고전 12:10, 28; 14:13-19; 행 2:1-13; 19:1-7; 10:44-46; 막 16:17)
- 이 은사는 성령이 말하게 함을 따라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비록 통상적인 목소리를 사용하지만 의식적인 생각이나 마음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말해진 언어나 노래는 전혀 배우지 않은 것들이다 (David Pytches).
- 방언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특정한 사람에게 주는 은사로서,
배우지 않은 생소한 언어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며,
배우지 않은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 (C. Peter Wagner).
- 방언의 은사는 성령이 어떤 사람이 전혀 모르는 언어로 즉흥적으로 말하게 하는 능력이다 (Bobby Clinton).
2) 말썽 많은 방언
방언처럼 많은 말썽을 부린 은사도 드물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회 내에서의 무질서한 방언 사용으로 말썽을 빚었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 사용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기록했을까?
사도 바울은 공중예배에서 통역 없이는 방언을 하지 말 것이며 통역이 있을 때라도 적당히 질서를 유지하라고 말했다.
방언은 또한 중세기에는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이때에는 "방언을 하는 자체가 귀신이 들린 증거"가 되어서 방언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 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
종교개혁, 웨슬레의 부흥운동, 미국의 제 1, 2차 대각성 운동 및 무디의 경건 운동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능력을 받는 성령 체험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모르몬교와 같은 사교집단에서만 방언 현상이 나타났을 뿐이다.
따라서 20세기의 초기에 미국의 찰스 파함 목사로부터 시작하여 흑인 목사 윌리암 세이무어가 불을 붙인
로스엔젤레스의 방언 운동이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의 유력한 외적인 표적은 방언"이라고 주장했고,
정도가 심한 경우는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받아야 구원을 받은 것처럼 주장하고,
방언을 하는 사람은 일등 신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등신자라는 인상을 가지게 하여
세속의 매스컴과 기존 교회들은 그들에게 사정 없이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었다.
당시 주류 교단과 매스컴은 이들을 혹독하게 매도했다.
이들은 오순절파를 소돔의 영적지도자들, 방언을 사탄의 마지막 토해낸 배설물, 오순절식 예배를 사탄숭배라고 공격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학력이나 생활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방언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A 자매는 전통적인 장로교에서 배운 대로 방언은 수준 낮은 사람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A 자매가 어느 은사적인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교인들의 대부분이 방언은 물론 여러 다른 신령한 은사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A 자매 보다 교육 수준이 높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복했고 신앙도 성숙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실을 목격한 A 자매는 마음문이 열려서 "그렇다면 나도 . . ."하면서 방언을 사모하여 쉽게 받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여태까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여러 가지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물론 방언은 구원의 신분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마 초기에 성령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기 때문에 이전에는 마치 구원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성령의 역동성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니 "이전의 신앙생활은 인간적이고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새로운 실상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방언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등 신자는 더욱 아니다.
방언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오늘날에도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는듯하다.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방언 운동으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성령 운동은 유럽, 인도, 러시아로 확장되어 갔고
남미에서 가장 많은 결실을 거두어서 오늘날 남미 개신교 신자의 거의 80%가 오순절 계통이다.
비난과 경멸과 박해의 대상이 되어 왔던 성령 운동―방언 운동―은 거부, 핍박 및 관용의 과정을 거쳐
이제는 수용 및 적용의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세월이 지나, 성령 세례의 초기의 실질적이고 유력한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던 고전적인 오순절주의자들도
이 주장을 어느 정도 수정하기에 이르렀고,
1960년대에 주류 교단에 퍼지기 시작한 은사운동은 방언을 성령 세례의 "여러 가지 표적 중의 한 가지 표적"으로만
인정하였고 이후 지속된 여러 성령 운동도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이것도 보면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소한 영적인 현상이나 가르침이 일어나면
초기에는 이런 저런 신학으로 부정하다가 주변에서 워낙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주장하거나 체험하고,
또 실제로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과연 서로 다른 방언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한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7-8).
그렇지만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더러 있다.
4) 표적 방언과 은사 방언?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거하는 "표적 방언"이고
고전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표적 방언은 단회에 끝나지만 은사 방언은 은사 받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로 오순절 계통에서 하는 주장이다.
5) 나라 방언과 은사 방언?
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나라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자기 나라말로 알아들었지만
고전의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방언하는 사람이 방언할 때 방언하는 본인이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여
그 외국어가 본국어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의 방언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물론 성경에서 구분해 놓았으니 구분은 해야되겠지만 꼭 본질이 다른 방언일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즉 비록 제자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을 했지만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방언 통역을 하여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한 나라 말만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8, 11).
오늘날 "나라 방언"을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기가 모르는 어느 한 외국어로 했다는 간증은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 말들"로 들었다는 간증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제자들의 방언을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하여 여러 다른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6) 차이에 관한 견해
정리하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의 차이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가 된다.
가. 첫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초기의 성령 체험을 실질적으로 증거하는 것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다.
나. 둘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는 나라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은사 방언이다.
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했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통변을 따로 해야 하는 은사 방언이다.
문제는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가이다.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구분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같지는 않다.
표적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나라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문제는 방언의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 본질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귀신론의 경우,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귀신의 기원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실제로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서로 물고뜯는데 소진하는 것을 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귀신의 기원에 하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의 잘못을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축사나 영적 전쟁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귀신의 기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교인들이 귀신들려 있으면 어떻게 해야될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외적 구분이 아니라 본질이다.
나라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표적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자기 나라 말로 들은 사람들은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11).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으로 인해 방언을 한 사람들도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높였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6)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5-16).
사도행전의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든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점이 방언의 외형적인 구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7) 그럼에도 방언은 유익하다
방언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인 유익은 모르고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나쁜 것만 보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면 합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는 입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죄인들이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지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거듭났지만 말썽 부리고 죄짓는 신자가 많다.
신자의 신분의 확실성,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보지 않고,
그의 현실적인 나쁜 행위만 보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군,"
"바른 교리를 입으로 고백은 잘하지만 고백한 대로 살지는 못하는군"이라면서
구원 받은 신분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불완전한 신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신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용서 받은 죄인,"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방언과 같은 영적 체험이나 영적 현상만은 완벽하기를 바라는가?
방언의 유익이 더 많지만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몇 가지 나쁜 것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언뜻 보면 말썽만 부리는 은사인 것 같지만 유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8) 방언의 유익
가. 통역된 방언은 공중의 덕을 세운다.
공중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고전 14:5).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의 효과를 가져와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역할을 한다(고전 14:4).
그러나 통역을 하지 않은 방언,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공중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다(고전 14:23).
남을 가르칠 때에는 알아듣는 말 다섯 마디가 통역이 없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전 14:19). 여기서 "남을 가르칠 때"라는 말에 유의하기 바란다.
방언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남을 가르칠 때는 무익하다는 말이지 방언 자체가 무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역 없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다(고전 14:27-28).
또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방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언하는 자체만을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4:23).
방언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방언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마음문을 열어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일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헬라어 글로싸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말(language)을 의미하므로
방언은 알아 듣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알아 듣지 못하는 말"(고전 14:2)이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죽은 믿음"도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란 절대적인 표현이 불가능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다.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성은 되지만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란 뜻이다.
나.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돕는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4).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는 방언이 반드시 통역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공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혼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시간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할 것인가?
개인의 영성 개발 없는 단체의 덕은 있을 수 없다.
방언의 효능은 개인의 내적 영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는 방언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병이 났을 경우 병원에 가서 의사가 수술하면 병이 낫는다.
환자가, 의사가 치르는 수술의 모든 과정을 모른다고 해서 수술 받는 것이 소용 없는 짓인가?
환자는 의사의 수술을 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그 사실만 알면 된다.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복잡한 수술 과정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방언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방언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의 말이기 때문이다(고전 14:2).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하면 심령에 평강이 임하고 기도의 응답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할 때 병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난다는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할 것인가?
나는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만 고장이 나면 번번히 전문가에게 가서 고친다.
복잡한 수학공식같은 것이 딱 질색이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나에게 필요가 없는가?
나는 컴퓨터의 스윗치를 켜서 내가 익숙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지금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그 정도만 알면 되지 않는가?
내가 컴퓨터의 복잡한 구조를 모른다고 해서 나에게 컴퓨터가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방언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기도응답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않지만 우리의 영은 분명히 열매를 맺는다(고전 14:14).
우리의 영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방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임재 속에 쉽게 들어간다.
보통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실질적으로, 체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하기 전에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금방 가시고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기분을 가진다.
그렇다고 꼭 방언 기도를 해야 이런 식으로 응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는 은사를 통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 진다는 말이다.
다. 방언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행 2:11; 2:45-46; 고전 14:15)
방언으로 찬송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나는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글을 보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언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보통의 말로 하는 찬양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하물며 영으로 찬미하는 방언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언젠가 미국인이 인도하는 찬양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찬양인도자가 가사 있는 찬양을 어느 정도 인도한 후에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허-밍 비슷하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응답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의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방언 찬송도 하고 신령한 노래도 불렀다.
그것은 마치 "허다한 무리의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겔 1:24).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 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자(겔 1;24), 예수님의 음성이며(계 1:15),
동시에 구원 받은 허다한 백성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다(계 19:6).
미국 암흑가의 깡패를 전도시킨 것으로 유명한 데이빗 윌커슨 목사와
[십자가와 깡패](The Cross and the Switchblade)를 집필한 성공회 신자이자 신문기자인 존 셔릴은
방언 찬송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음악이 시작됨에 따라 탁자주위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악보도 없는 즉흥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찬양인도자는 더 이상 노래를 인도하지 않고 음악이 흐르는 대로 맡겨두었다.
누구의 인도함도 없이 회중의 사분지 일 정도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한 가지 하모니와 또 다른 하모니가 들락날락하며 서로 영글어 졌다.”
*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고전 14:15), 신령한 노래(엡 5:19; 골 3:16),
성령 안에서 노래 부르기, 또는 하나님의 존영(the high praises of God)(시 149:6)이라고 한다.
제임스 던은 신령한 노래(엡 5:18)가 곧 방언 찬송이며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음성가나 경배송을 신령한 노래하고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체험했다.
어느 주말 재학 중인 신학교를 출발하여 섬기는 교회를 향해 약 2시간 동안 운전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감이 있는 찬양 테이프를 들으면서 얼마간 따라 부르고 있노라니 갑자기 심령 깊은 곳에서 생전에 듣지 못한 고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하면서도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듯한 소리였다.
부르고 있노라니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듯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5)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개인의 경건 시간에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매우 즐긴다.
방언 기도보다는 방언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라.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된다
방언의 주요 기능은 기도와 찬양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그런 만큼 방언 말함은 곧 방언 기도이자 방언 찬양이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초청하는 좋은 수단이다.
필자도 어떤 경우에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방언을 말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예언 사역을 강조하는 미국의 크리스천 인터내셔날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의 일환으로 방언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서로를 위해 방언 기도를 한 후 잠시 침묵했다가, 떠오르는 생각, 느낌 또는 음성을 나누면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필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을 때는 회개 기도를 철저히 하고 방언 기도를 많이 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보통 때 듣지 못하는 여러 음성을 더욱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언이야 말로 모든 다른 은사로 통하는 대문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 때마다 쉬지 말고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마.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14-15)
특별한 경우 외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혀를 통제하므로 무한정 할 수 있다.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시간상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오토매틱 파일러트와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도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고전 12:18),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 12:39).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고전 12:30), 자기는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므로(고전 12:5),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고전 12:39).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는 그 내용을 모르지만 성령께서 내 대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기도 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이 기도가 곧 방언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기도 자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기도는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로가 자기의 체험이나 무체험을 증거하는 구절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방언기도든 보통 기도든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방언 기도에도 해당이 되고 보통 기도에도 해당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때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깨달았다.
언젠가 교인 한 명이 뺑소니 교통사고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나에게 법원에 가서 영어로 통역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판사 앞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통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판사는 나에게 "뺑소니 교통사고는 사안이 중요한 사건이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판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법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대하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법을 전공한 사람들끼리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전문적인 지식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나같이 법에 대한 일반인이 나설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어떤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가 많다.
이때 성령은 우리 사정을 잘 아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존경하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 연구>에서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자의 입장과 서신서를 역사서인 사도행전보다 우위에 놓은 잘못된 입장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전반적으로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주기도문 식으로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다고 한다.
글쎄? 나는 훼케마와 같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주기도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때로는 도대체 내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방언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나는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방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노라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때로는 성령께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신다.
내가 마땅히 어떻게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완전히 내 입장이 되셔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 레이몬드도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몬드, [신오순절 운동 비판],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4).
이런 주장도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에 근거한 주장에 불과하다.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S. 모티어는 성경 말하는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자세히 분석한 후 이렇게 결론 짓는다.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미스테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 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 11:3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몬드는 이제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다 드러났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은 없다고 주장한다.11)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성경에 계시되었으므로 방언도 이제 더 이상 비밀의 말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얼마나 주제 넘고 건방진 주장인가?
성경에는 분명히 그 의미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자기의 신학으로 성경의 명백한 구절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기적종식론에 사로 잡히다 보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조차 부정하는 기현상이 속출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성경을 제일 잘 알고 제일 잘 변호한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바. 방언은 영적인 무기다
말로 알아 듣을 수 있는 기도와 찬양이 영적인 무기인 것과 마찬가지로 방언 기도와 방언 찬양은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는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성령의 능력은 귀신의 세력을 물리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