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시어, 시구 풀이]
님 : 한용운의 시에서는 생명적인 근원, 중생, 조국, 민족, 붙타, 애인, 불도 등 다양한 뜻을 지님 깨치고 : '깨뜨리고'의 사투리 장수박이 : '정수리'의 경상 방언,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 푸른 산빛 : '미래에 대한 찬란한 희망'의 뜻을 함축. '단풍나무 숲'과 대조됨 단풍나무 숲 : '절망, 조락(凋落)'의 뜻을 함축. 불교의 '공(空)' 사상과 연결됨 황금의 꽃 :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찬란한 사랑의 약속'이란 뜻. '차디찬 티끌'과 대조됨 푸른 산빛을 깨치고 - 적은 길을 걸어서 : 임이 가 버림으로 해서 푸른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조락과 슬픔이 깔린 자연이 펼쳐져 있음을 나타낸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는 시각적 이미지의 강렬함을 나타내며, 시구 전체는 강한 리듬에서 약한 리듬으로의 극적 변화를 유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