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은 바위의 바다다. 여기저기 함부로 솟아 오른 바위 봉우리들이 풍랑을 겪는 바다에서 하얀 포말로 부서지는 파도처럼 거칠게 일렁거린다. 그 파도는 하얀 선을 그린 채 골골을 이뤄 산산이 부서진다. 저 거친 바위 파도의 너울을 바라보는 산꾼들은 한바탕 멋진 서핑을 꿈꾼다.
파도를 가르며 가슴속까지 후련하게 거친 바다를 달리는 것은 해보지 않은 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쾌감이다. 아! 물씬 물씬 분비되는 이 아드레날린의 짜릿함! 아무래도 이 아드레날린에 중독되었나보다. 지난달에 이어 다시 대둔산을 찾았다. 아마 오늘 손가락은 얼어 곱을 것이고 바위에 매달려 확보라도 볼라치면 틀림없이 사시나무 떨듯 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도 대둔산에 오면 기분이 좋다. 모든 게 그놈의 아드레날린 중독 탓이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시큼하다. 이런 날씨에 등반을 나선 이들은 아무래도 중증 중독자임이 분명하다. 오늘 대둔산에 모인 중증 중독자들은 모두 아홉명.
홍현(37세·대전 클라이머산장 대표), 허창수(38세·K2코리아 대전지점 대표, 대전 등산학교 동문회), 한미정(29세·대전 부부산악회)씨 그리고 무녀독남 외아들로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산에 입문한 어린 중독자 김영순(17세·대전 동상고 1학년), 낯선 땅에 와 중증 중독자들과 어울리다가 함께 고달픈(?) 중독자의 길을 걷게 된 노랑머리 푸른 눈의 제이크 프레스든(Jake Preston·29세·호주 출신 영어강사) 그리고 오늘 함께 복용하게 될 약(?) 리지 ‘양파’의 주인공 김무길(61세·대전 부부산악회 회장), 김혜숙씨(48세·대전부부산악회) 부부. 그리고 기자와 장병희 사진기자.
이 아홉 명의 중증 중독자들이 대둔산 케이블카에 올랐다. 지난 9월 중순경 개척을 마무리 한 대둔산 리지 ‘양파’는 홍현씨가 주축이 되어 대전 부부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약 3개월간의 개척작업 끝에 완성되었다. 개척작업 대부분을 청소에 매달려야 했다. 좀처럼 깨끗한 속살을 보여주지 않던 탓에 ‘양파’라는 이름을 지었다지만 사실은 올해 환갑을 맞는 김무길 회장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김무길, 김혜숙씨 부부는 대전시 용전동에서 ‘양파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케이블카는 순식간에 우리를 금강문까지 올려 무수한 단풍 관광객들과 함께 와르르 토해 놓고 다시 쏜살같이 내려간다. 한번에 50명이 타는 케이블카에서는 창 밖을 내다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빽빽한 콩나물 시루처럼 몸조차 돌리기 쉽지 않다. 그저 케이블카가 매달린 저 케이블이 튼튼할까 하는 걱정만. 다행스럽게도 그 걱정이 무럭무럭 자라나 안절부절 하기 전에 케이블카는 도착했다. 케이블카 역시 높이 솟구쳐 아득한 아래를 굽어보는 것이지만 도대체 이것으로부터는 단 한 줄기의 아드레날린도 분비됨을 느낄 수 없으니 이는 또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서둘러 케이블카 터미널을 빠져 나와 금강문 아래 동심바위를 지나 돌길이 사무친 등산로를 따라 5분 정도 내려오면 첫 번째 매점에 닿는다. 이미 등산로에는 오르고 내려가는 등산객들이 가득하다. 소리쳐 부르는 소리하며 함부로 외쳐대는 ‘야호’하는 외침, 누군가는 아침부터 노래를 불러댄다. 소란스럽기가 장바닥이 따로 없다. 간밤 집단시설지구의 요란한 네온사인과 음악소리, 취객들의 고성방가 때문에 호젓한 산중의 밤은 포기했지만 오늘의 아드레날린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노랑색 화살표로 시작되는 양파의 첫 껍질
서둘러 매점의 축대를 따라 오솔길로 접어든다. 낙엽이 잔뜩 뒤덮인 오솔길은 가파르고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도 그 소란함과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단숨에 오른다. 이윽고 숨이 턱에 차고 땀이 지긋이 밸 무렵 동심바위와 형제바위를 연결하는 능선 고갯길에 닿는다.
비로소 저잣거리를 벗어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곳에서 ‘양파’의 들머리까지는 마천대 방향 능선을 따라 약 3분 거리. 홍현씨와 허창수씨, 제이크는 미리 두 번째 마디 종료지점까지 우회로를 따라 가다가 큰 바위 밑에 준비해 온 점심식사용 도시락을 숨겨 두었다. 그리고 다시 들머리에 모였다. 양파의 첫 껍질을 까기 위해. 들머리에는 노랑색 스프레이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첫마디는 짧지만 흐르는 스텐스와 숨어 있는 홀드를 잘 찾아내야 한다.
홍현씨가 능숙한 솜씨로 첫마디를 넘어선다. 제이크는 긴 팔다리를 이용해 성큼 넘어서고, 고교생 김영순 군도 암벽등반 경력 3개월이 믿기지 않게 침착하고 부드럽다. 첫마디를 올라 두 번째 마디 출발점에 섰을 때 이미 김혜숙씨와 한미정씨는 두 번째 마디의 정상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회로가 있어 미리 올라간 것이다. 약(?)기운이 조금 약할 테지만 등반시간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다. 뿌연 하늘에 찬바람이 불어댄다. 바위에 닿는 손가락이 금방 시려온다. “매우 춥다!” 한국에 온 지 10개월 된 제이크의 ‘매우’절제된 감탄사. 제이크 역시 이미 칼라파타르, 마운트 쿡 등지를 등반한 경력이 있는 말기 중독자다. 그의 발을 살짝 밟았다.
제일 자신 있는 영어 한마디·“아이 엠 쏘리”, 곧바로 이어 지는 제이크의 대단히 절제된 우리말 대답! “문제없다!” 두 번째 마디는 제법 힘과 균형감각을 요구하는 15미터 가량의 직벽등반이다. 작게 갈라진 세로 크랙들이 있으나 손가락 한 마디의 힘과 작은 스텐스를 정확하게 찍어 디딜 수 있어야 등반이 가능하다. 홍현씨가 역시 날렵하고 부드럽게 오른다. 김영순 군은 몇 번의 안간힘 끝에 올라섰고, 제이크도 몇 번인가 작은 스텐스를 찍어 디딘 다리를 달달 떨어대더니 끝끝내 올라섰다. 굵은 향나무에 걸린 와이어에 확보 줄을 걸더니 다시 빠질 수 없는 그의 감탄사! “매우 어렵다!”
“매우 춥다”그러나 “문제없다”
두 번째 마디를 오른 후 서너 개의 피너클 지대를 지날 때부터 대둔산의 바위 파도가 거칠게 넘실대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이 세차다. 춥다. 금강구름다리에 몰려있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줄지어 느릿느릿 건너는 것이 보인다.
누군가 한사람이 다리를 건너던 중 무섭다며 난간을 잡고 버틴다면 그 뒤에 선 사람들은 속절없이 그 사람이 다시 용기를 내고 마음을 다잡아 먹고 발걸음 옮기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사정은 그 위 삼선구름다리에 이르면 더 심각해진다. 45도 각도로 암봉 사이에 걸친 삼선 구름다리는 앞선 사람이 중간에 멈춰 서 버리면 뒤돌아 내려설 수조차 없다.
오로지 다시 그 사람이 젖 먹던 용기까지 짜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몇 개의 피너클 지대를 지나면 굵은 소나무에 하강용 와이어와 링이 설치되어 있다. 22미터의 오버행 하강을 마치자 아까 점심 도시락을 숨겨둔 바위 밑에 도착한다. 먼저 하강을 마친 김혜숙씨와 한미정씨가 끓여 주는 커피 맛이 일품이다.
머리 속이 투명해 질만큼 차디차고 맑은 대기 속에서 가슴까지 뜨뜻해 지는 커피 한잔의 여유는 우리가 어쩔 도리없이 중독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푸르지크 매듭까지 이용해 신중하게 하강한 제이크가 로프를 사린다. 그리곤 커피 한 모금. 그의 푸른 눈에 행복한 약(?) 기운이 번진다. 세 번째 마디. 손가락 반 마디만 걸리는 홀드를 잡고 턱걸이하듯 매달려 역시 미세한 스텐스를 왼발로 딛고 튕겨 일어서며 큰 턱을 잡아야 한다.
역시 홍현씨가 사뿐히 넘어 섰고 이내 허창수씨와 김무길 회장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어렵게 넘어선다. 네 번째 마디는 커다랗게 잘 발달된 크랙을 이용해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네 번째 마디에 오른 후 취재팀이 모두 모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려야 했다. 김혜숙씨와 한미정씨에게는 세 번째 마디 등반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하늘이 시시각각 변한다. 금새 햇볕이 비추더니 금방 또 구름 속으로 사라져 기온이 뚝 떨어진다. 동심바위를 등반하던 사람들도 추위에 쫓겨 다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노랑색 셔츠와 빨간 헬밋을 쓴 제이크가 네 번째 마디를 올라선다. 손에 보라색 장갑을 끼었다.
그리곤, “제이크, 매우 춥다!” 쉬운 슬랩으로 이루어진 다섯 번째 마디를 오르니 진교영(43세·대전 부부산악회), 권순자씨(43세) 부부가 우회로로 올라 도착한다. 본지 99년 8월호 대둔산 우정길 취재에 동행했던 인연으로 장병희 기자와 반가운 해후를 나눈다. 이렇듯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어느 암봉, 어느 바위틈에서 과거의 인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손 시렵고 추운 중독자의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 마천대 정상의 하얀 개척탑 주변으로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북동쪽 멀리로는 서대산이 우뚝하고, 남쪽 멀리로는 한달 전이나 다름없이 덕유산이 꼭 한 뼘의 길이로 가로누웠다. 바로 아래 대둔산의 능선 끝자락에는 듬직한 천등산이 우람한 뒷모습으로 버티고 앉았다.
그리고 그 너머 멀리 모악산도 한 달 동안 별일 없었구나! 이렇게 시원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것도 우리가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커다란 이유. 양파의 마지막 속 껍질 부채바위 몇 개의 피너클을 넘자 굵은 소나무에 하강용 와이어와 링이 걸려 있다. 바로 앞으로는 ‘양파’의 마지막 마디 부채바위다.
과연 부챗살처럼 작은 크랙이 수없이 갈라졌다. 등반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여섯 번째 마디를 등반 후 다시 되돌아와 하강 지점으로 올라 다섯 번째 마디 피너클 지대에서 동쪽 사면을 따라 하산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강지점에서 머물렀다. 모두 다 등반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판이다. 이곳에서는 여섯 번째 마디의 등반 모습이 잘 보인다.
여섯째 마디 역시 홍현씨가 선등에 나선다. 큰 크랙 속으로 작은 크랙이 형성되어 있어 보기보다 어렵진 않다. 교과서적인 레이백 자세를 요구하는 여섯 번째 마디는 오늘 등반한 ‘양파’의 하이라이트. 진교영씨가 어렵고 힘들게 오른다. 그러나 전혀 힘들거나 어렵지 않게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로 묻는다. “여길 어떻게 넘어가야 하는 겨?” 제이크는 장갑을 낀 채 등반을 시작한다. 크랙에 재밍을 해야 하는데 불편할 듯 싶어 벗는 것이 좋겠다는 기자의 말에 지체없이 간단히 대꾸한다.
“문제없다!” 아! 씩씩한 제이크!
과연 몇 번 다리를 떨더니 또 몇 번인가는 끙끙거리다가 ‘텐션’이라며 몇 번 외치지도 않더니 별 ‘문제없이’ 거뜬히 올라선다. 여섯 번째 부채바위를 오르고 나니 암릉이 이어지지 않고 끊겼다. 계속 이어가자면 하강 후 서쪽으로 작은 계곡 건너편 암릉으로 이어가다가 마천대 정상 능선까지 등반을 하거나 마천대 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잡목 숲 지대를 헤치고 간 후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과 연결하면 될 듯싶다. 그것까지는 여태껏 양파 껍질을 벗겨 온 이들의 몫일 터. 오늘은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여섯째 마디를 도로 하강한 후 다시 하강했던 다섯 번째 마디까지 올랐다.
기다리던 사람들은 추위에 다들 바싹 움츠리고 있었다. 다섯째 마디 등반 종료지점과 하강 지점 사이의 바위틈 사이를 지나 동심바위 쪽 계곡으로 가파른 바위지대를 조심스럽게 하산하여 점심 도시락을 숨겨둔 지점에 도착한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였다. 중독된 탓에 허기조차 잊고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운다. 제이크는 연신 김치를 집어먹는다. 장병희 기자의 젓가락도 분주하게 드나든다. 그리곤 다시 커피 한잔. 이 커피 한잔으로 이 아련한 중독상태가 또 한동안 지속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글|윤대훈 기자 사진|장병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