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우리는 96년의 쓰라렸던 경험과 재도전의 설레임을 안고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원정대의 등반기점인 사천성은 이상기온 현상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산악지역의 도로가 곳곳이 산사태로 유실되어 접근부터 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10월 14일, 3500미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원정대는 다음날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공가산(7,556m) 정상은 여전히 폭풍 속에 모습을 감춘 채 우릴 내려보고 있었다. 16일 아침. 힘찬 파이팅 속에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40분만에 대암벽 구간이 나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하일로코 빙하의 아이스폴을 우회하여 우측 사면 4300미터에 1캠프를 설치했다. 1캠프는 초원지대로 비교적 조건이 좋았다. 19일, 원정대는 1캠프 출발부터 이어지는 너덜지대를 통과하여 2캠프(4,900m)까지 순조로운 등반을 펼쳤다. 경사진 곳이나 돌더미 위에 텐트를 설치한 대원들은 대부분 2∼3장의 매트리스를 깔고 생활했다. 자고 일어나면 입구로 밀려나거나 해서 온갖 장비를 동원해 바닥을 다지는 등 정말 가관이었다.
3일 동안 내린 폭설로 1, 2캠프는 무너지고
공가산은 원정대의 순조로운 그동안의 등반을 시샘이라도 하듯 내내 좋던 날씨는 돌변해 2캠프에 진출한 날부터 3일 동안 쉬지 않고 폭설을 내렸다. 결과는 처참했다. 어렵게 설치한 1캠프, 2캠프의 텐트 3동이 완전히 뭉개진 것이다. 등반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부서진 캠프를 정비하기 위해 3일을 소비했다.
다행히 대원들 건강상태는 모두 양호했다. 우리는 캠프 재건축을 힘들게 마치고 계속해서 등반을 했다. 10월 27일에 5300미터의 빙하위에 3캠프를 설치하고 베이스캠프로 철수했다. 이틀간의 휴식을 취한 우리는 등반이 성공 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10월 29일부터 다시 등반을 시작했다.
이곳의 날씨는 국립기상대의 일기예보와는 너무 달라 예보를 무시하고 우리식대로 등반하기로 했다. 31일 4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밑에서 올려다 본 500미터 높이의 꿀르와르는 등반거리 800미터 정도로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등반 구간이 크러스트 상태가 좋아 빙판으로 덮여 있어 예상 밖으로 빠른 속도로 등반했다.
96년 등반 당시 4캠프 구간은 눈이 크러스트 되지 않아 떨어지는 돌은 눈속에 그대로 묻혔기에 신경 쓰지 않고 눈사태만 조심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그야말로 전쟁터다. 돌 떨어지는 소리는 유탄 소리를 내며 주변으로 스치는데, 한방이면 생명은 물론 등반도 끝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하여 최대한 몸을 헬멧과 배낭 속으로 웅크리고, 눈은 쉴새없이 전방을 주시하며 4캠프로 향했다.
4캠프 루트 개척 첫날 무사히 600미터의 로프를 설치하고 3캠프로 귀환했는데, 무서운 바람으로 텐트 자체를 몸으로 버티고 있어야 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짐 수송과정에서 화장지가 빠진 것이다. 그때부터 생리현상은 최대한 참아야 했고, 식기는 개인이 보관했다. 모두들 작은 소망이 있다면 화장실에서 마지막까지 시원하게 뒷마무리를 하는 것이다. 평소 송형근대원은 ‘10월의 마지막 밤‘ 이면 추억에 잠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화장실을 그리며 끔찍한 10월의 마지막 밤을 맞았다.
꿀르와르 등반중 정면으로 맞은 눈사태
11월 1일. 1캠프에 체류하고 있던 윤중현 대원을 제외하고 캠프별 교대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틀 교대로 짐 수송과 루트개척을 하며, 고소 적응 효과까지 보면서 전 대원의 등정을 노렸다. 3일, 4캠프로 향한 임찬수, 우기정, 신광철 대원은 전날 내린 눈으로 고정로프가 모두 묻혔기 때문에 꿀르와르 중단까지 고정로프를 파내고 2캠프로 내려왔다.
세명의 대원은 이날 엄청난 체력을 소모했다. 1캠프에 체류했던 윤중현대원은 3캠프로 올라가고, 신광철대원은 1캠프으로 하산했다. 대원 모두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를 힘 빠지게 한 것은 베이스캠프에 있는 통역관 엄태우씨(26세)의 무전이다. 그동안 내렸던 눈으로 베이스캠프가 완전히 파괴됐다는 연락이었다.
이제 우리는 등반 중의 캠프 외에는 돌아갈 보금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등반에 필요한 식량과 장비를 모두 캠프에 올려놓았고, 베이스캠프에는 정상 등정 후 내려갈 계획이었기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11월 5일, 필자를 비롯하여 윤중현, 오종락대원은 4캠프로 오르는 꿀루와르 상단 루트를 개척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2캠프에서 3캠프로 짐수송을 맡은 임찬수, 우기정, 송형근대원도 러셀하느라 파김치가 되었다.
이튿날, 5800미터 지점에 4캠프를 설치했다. 크레바스 위의 크러스트 잘된 곳에 설치했는데 2동의 텐트가 들어가고 화장실을 만들 만큼 조건이 좋았다. 96년 등반당시 이곳은 바람이 강해 설치한 텐트를 폴만 남기고 날려 버렸다. 아무튼 우리에겐 사람 몸을 날리던 예전의 강한 바람이 없는 것이 행운이었다. 모처럼 4캠프에 모인 전 대원은 그 동안의 등반 이야기로 얘기꽃을 핀다.
이날의 화제는 오종락대원이 꿀르와르를 오르는 동안 눈사태를 네번이나 맞은 이야기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눈사태에 섞인 낙석을 보면서 헬멧과 배낭으로 막았지만 꿀르와르를 가득 채우고 쏟아지는 눈사태를 피할 길이 없어 그저 고정로프만 믿고 옆으로 비켜선 채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오종락대원은 고정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빙하쪽으로 150미터를 밀려갔고, 다시 오대원이 올라오는데 두번째 눈사태가 그를 덮쳐 또 다시 20미터를 밀려 내려가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영광의 루트 초등, 눈물의 하산길
12일, 5캠프로 등반을 계속한 우리는 준비한 고정로프가 모두 소모되는 바람에 6400미터 지점에 임시로 텐트를 설치하고 밤을 보냈다. 이날 필자와 송형근대원은 4캠프로 하산했다. 이튿날 4캠프에 내려온 필자와 송현근대원은 5캠프로 오르는 하단부 150미터 고정로프를 회수해 다시 6400미터의 임시텐트로 올랐다.
계속해서 6500미터까지 진출한 우리는 커다란 자연 설동에 2동의 텐트를 설치한 5캠프를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의 여유는 없다. 어떻든지 이곳에서 끝장을 봐야했다. 10월14일, 새벽 3시 20분. 날은 몹시 추웠지만 우리는 조를 나누어 정상으로 출발했다.
필자와 송형근, 오종락대원이 함께 줄을 묶고, 임찬수, 윤중현, 우기정대원이 안자일렌을 했다. 랜턴불에 의지한 채 정상으로 향했다. 7000미터쯤에서 체력 손실이 많은 송형근, 우기정대원은 포기하고 하산했다. 그때부터 필자와 오종락대원이 함께 오르고, 임찬수, 윤중현대원은 각자의 컨디션 등을 고려해 등반했다. 마침내 오후 2시 5분 오종락, 윤중현, 필자 순으로 정상에 올랐다.
공가산 정상을 일곱번째로, 그리고 북동릉으로는 세계 초등을 이룩하는 순간이었다. 정상은 넓었으며 바람이 강하고 너무 추워 사진 몇 장만 찍고 곧바로 하산했다. 필자를 비롯한 오종락, 윤중현 대원은 올라온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등정조는 하산중 7300미터 부근에서 단독으로 올라오는 임찬수대원을 만나 하산할 것을 권유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임찬수 대원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고민을 하는 듯 보였다. 그때부터 하산길에 우리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휴식을 마치고 먼저 하산하던 오종락대원이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올라온 루트 반대편인 얀초코빙하 하단 부근에서 눈구름이 피어오르더니 그 사이로 오종락대원이 추락하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손 하나 쓰지 못하고 오종락대원이 3000미터나 추락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언 눈물을 뿌리며 하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글·김재명 사진·임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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