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진씨(28)는 ‘유부녀 레즈비언’이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이 말은 ‘남자와 결혼한 레즈비언’을 가리킨다. 김씨는 이 말의 정의를 바꾸고 싶었다. ‘여자와 결혼한 여자’ 뜻으로 말이다. 그는 ‘한국’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싶었다. ‘동성혼 합법화’라는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기다리느니, 당장 ‘진짜 유부녀 레즈비언’으로 살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결혼이란 무엇일까. “법적 인정 여부만이 결혼의 전부라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하진 않을 것”이라고 김씨는 생각했다. 올 봄 동성결혼이 합법인 미국 뉴욕에서 혼인신고를 했다. 올 11월엔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다음엔 “재산으로 지저분하게 엮이는” 경제공동체 형성이다. 제3자 상속이나 보험수익자 지정이 현행법상 어렵다는 사실을 안 뒤로 법인 설립 같은 방법으로 공동명의 재산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이성애자 부부처럼 경조사 휴가를 받아 신혼여행을 가는 것. 회사 사람들에게는 커밍아웃을 한 상태였지만, 경조사 신청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것은 선례를 만드는 일이었다. 김씨는 뉴욕에서 받은 결혼확인서를 제출하며 인사팀에 가능 여부를 정식 문의하려고 했다. 미국 뉴욕주는 관광객으로 온 동성애 커플에게도 결혼확인서를 발급한다. 다만 이 확인서는 한국에서 법적 효력이 없다.
팀장이 김씨를 만류했다. “이성애자들도 청첩장만 내면 되는데 뭐하러?” 청첩장만 첨부하면 휴가와 경조금을 주는 것이 회사 관례다. 혼인신고를 미루는 젊은 부부들이 많기 때문이다. ‘경조금은 이성애자만 지급가능하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팀장은 걱정하는 김씨에게 “받아야 하는 게 맞고, 인사팀에는 언질만 준 뒤 신청하라”고 조언했다. 성소수자라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증명할 이유는 없다는 팀장 말이 김씨 마음에 오래 남았다.
■ 일상을 바꾸는 퀴어들
김씨에게는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남들보다 하나 더 있다. 성정체성을 드러내도 안전한 회사인지, 즉 ‘퀴어 프렌들리’한 회사인지다. 김씨는 외국계 회사를 선호했다. 미국이나 유럽 본사가 퀴어 프렌들리 정책을 시행하면 한국 지사가 이를 완전히 무시하긴 어렵다고 판단했다. 여러 회사에서 인턴을 했고, 그 회사들에 입사하자마자 커밍아웃을 했다. “남자친구 있어요?”라는 질문에 “남자친구는 없는데 여자친구는 있어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김씨는 “회사마다 좌절한 지점들이 있었다”고 했다. 첫번째 회사에선 상급자에게 커밍아웃한 지 하루 만에 소문이 퍼졌다. 두번째 회사 사람들은 자신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불편하고 어색해했다. 세번째 회사 회식자리에선 “우리 회사가 자유로워 보여도 동성애에 대해선 그렇게 열려있지 않다”는 말이 농담처럼 오갔다. 마지막인 현재 직장은 달랐다. 자신이 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개의치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들보다 회사에 커밍아웃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일까. 김씨는 “더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실패할 경우 직장 생활이 힘들어지거나 뒷소문이 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 부담이 크죠. 하지만 퀴어 프렌들리한 직장에 입사했다면 더 쉬울 수도 있어요. 저는 회사에서 친한 친구가 아니라 성과를 내는 사람이잖아요.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일 잘하는 동료가 좋기 마련이에요.”
스스로를 ‘프로 커밍아웃러’로 소개하는 그였지만 신혼여행 휴가신청서를 기안할 땐 떨렸다. “98%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만약 2% 가능성으로 반려되거나 추가 증빙을 요구한다면?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난 2일 결혼 경조금 신청서를 제출했다. 반나절 만에 3명의 결재권자 승인이 차례로 떨어졌다. 인사팀에서 “결혼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승인 통보를 받았을 땐 울컥했다. 김씨는 “남들 다 받는 신혼여행 휴가를 받은 것이 이렇게까지 기쁜 일인가 싶지만 그래도 정말 행복했다”며 “배우자 부모의 환갑 경조금도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 가시화의 힘
김씨는 2일 트위터에 “레즈비언인데 회사에서 신혼여행 휴가랑 경조사 신청 승인 받은 썰 푼다!!!”며 이 사실을 알렸다. 19일 현재 9000회 넘게 공유됐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로부터 진심 어린 축하가 쏟아졌다. 주변 여러 동성애자 친구들이 “고맙다”고 했다. “처음엔 ‘내가 좋아서 결혼하는데 왜 너희들이 고마워하냐’ 했거든요. 그런데 나에게 좋은 일이 남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김씨도 다른 사람 도움을 받았다. 성정체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김씨는 늘 결혼하고 싶었지만, “정말 노력해야 50살쯤에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초 친한 언니가 미국인 여자친구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레즈비언 관광객 두명이 캐나다에서 결혼확인서를 받았다는 블로그 글을 보고선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했다. 막연한 꿈을 눈앞의 현실로 만든 건 ‘선례’였다.
한국에서도 결혼식을 올리는 성소수자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막상 보이지는 않았다. 정보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한달 전부터 블로그와 트위터에 일상을 공유한다. “왜 아무도 나에게 레즈비언으로 잘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나 궁금해하다, 그냥 제 얘기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김씨의 블로그 소개글이다.
변화는 곧바로 시작됐다. 내년 2월 결혼을 준비 중인 이혜리씨(22)의 ‘예비 신부’는 최근 인사팀에 문의해 “동성 신혼부부도 사내몰 포인트, 신혼여행 휴가, 경조금 등 모든 복지혜택을 동일하게 적용받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김씨 트위터를 보기 전까지는 경조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회사에 커밍아웃한 이씨와 달리 예비 신부는 성정체성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편이었다. 예비 신부의 회사는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중견기업이다.
“저도 와이프(예비 신부)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규진씨 트위터를 보고 감명받았나봐요(웃음). 용기를 준 규진씨에게 감사하죠.” 이씨도 결혼을 원하는 성소수자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러한 사실을 트위터에 알리고 있다.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공격에 노출되기 쉽다. 신상을 공개하는 순간 ‘특정성’이 생긴다.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적용이 가능하다. 이씨가 말했다. “저는 유명해지고 싶어요. 유명해져야 사람들이 제 말을 들어주고, 그렇게 얻은 발언권이 곧 우리들의 힘이 될 테니까요.”
결혼하고 싶어하는 동성애자들에게는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법적인 변화(동성화 합법화)도 일이 터진 후에야 생기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사람이 나와야 하고, 그래야 일상의 선례가 쌓여요. 주저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생각보다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 한국식 공장형 레즈웨딩
김씨는 “한국식 공장형 레즈웨딩”이 꿈이다. ‘공장형’이라는 건 양가 부모님이 화촉을 밝히고,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고, 사진 찍고 밥 먹는 흔한 결혼식을 말한다. 모바일 청첩장도 이성애자 신혼부부가 많이 이용한다는 회사에 주문했다. 문구도 ‘베스트 1위’로 골랐다. 공장형 웨딩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선언적 이유”도 있다고 김씨는 말한다. “익숙한 광경인데 딱 3%만 다르면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온다고 해요. 그런 강한 인상이 남는 웨딩을 하고 싶었어요.”
많은 동성애자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스몰웨딩을 선택한다. 김씨의 동성애자 친구들은 “일반 웨딩홀에서도 대관을 해주냐”고 물었다. “웨딩홀 격이 떨어진다”며 대관을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반응은 예상외로 호의적이었다. “손님이 성소수자인데 괜찮겠냐”는 웨딩플래너 질문에 웨딩홀 업체 중 한 곳은 “다 똑같은 돈인데 뭐가 문제냐”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갈 길은 여전히 멀다. 김씨는 모바일 청첩장에 있는 ‘신부’ ‘신랑’ 표기를 수정할 수 있는지 문의했다. 직원은 “그런 경우가 없기 때문에 수정이 어렵다”고 했다. 김씨는 “혼주 표기도 부모가 없는 신랑·신부를 위해 배려 차원에서 수정할 수 있게 돼 있지 않냐”고 했고 다음 업데이트 때부터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죠. ‘왜 나는 이성애자들이 안 겪는 일을 겪나’ 하고 너무 슬퍼하진 않으려고 해요. 삶은 힘든 거고, 결혼은 어려운 거니까요. 제가 겪는 일도 수많은 어려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헤쳐나가려 합니다.” 지금 김씨의 청첩장엔 ‘신부 김규진’ 대신 ‘신랑 김규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김씨 같은 요청을 하는 동성 부부가 늘어나면 기업들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김씨는 믿는다.
한국에서 동성결혼이 ‘시기상조’가 아닌 적은 없었다. 법원은 정치로 공을 넘겼고, 정치인은 매번 다음을 기약한다. ‘동성 부부 제1호’ 김조광수 영화감독·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는 ‘구청이 동성 부부 혼인신고를 불허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낸 소송(가족관계등록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불복신청)에서 1·2심 모두 패소했다. 2016년 서울서부지법은 김 감독 부부가 낸 항고를 기각하며 “시대적 상황 등이 달라졌지만 별도의 입법 조치가 없는 한 현행법 해석만으로 동성 간의 혼인이 허용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김승환 대표는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고 했다. 김 대표는 “2013년 결혼 때도 웨딩업체들은 예상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며 “결혼식을 원하는 동성커플에게 ‘업체를 연결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때만 해도 확실히 주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정치권이 이런 흐름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김 대표가 말했다. “대선 주자나 공직 후보자가 동성결혼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공격성 질문’을 받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로 봐요. 사람들을 고민하게 하니까요. 새로운 세대의 인식도 바뀌고 있고, 직장에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잖아요. 다음 정권쯤엔 동성결혼 합법화를 공약으로 내거는 정당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