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나무의 열매. 후추나무는 후추과에 속하는 상록덩굴식물. 인도 남부가 원산지이다. 일찍부터 향신료로 이용하여 왔는데 성숙하기 전의 열매를 건조시킨 것을 검은 후추라 하고, 성숙한 열매의 껍질을 벗겨서 건조시킨 것을 흰 후추라 한다. 주로 가루내어 이용하며, 통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유형 | 동식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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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식물, 열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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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분류 | 후추목 후추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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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 | 인도 남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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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개화시기 | 4∼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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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후추나무의 열매.
내용
한자어로는 호초(胡椒)라고 하며, 향신료로 쓰인다. 후추나무는 후추과에 속하는 상록덩굴식물로 인도 남부가 원산지이다. 줄기는 목질(木質)이며, 마디에서 착생근(着生根)이 자라서 다른 물체에 붙어서 자란다. 잎은 어긋나고 두꺼우며, 넓은 달걀 모양 원형이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4∼10월 사이에 피며, 수상화서(穗狀花序: 한 개의 긴 꽃자루에 여러 개의 꽃이 이삭처럼 붙어 피는 꽃차례)를 이룬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5∼6㎜이며 자루가 없고, 10월에서 이듬해 4월 사이에 붉게 익는다. 후추는 고기의 누린내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일찍부터 향신료로 이용하여 왔다.
유럽에서는 서기전 400년경 아라비아상인을 통하여 전래되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후추를 불로장수의 정력제라 믿었는데 후추의 산지인 인도와의 사이에 아라비아가 가로막고 있어서 아라비아상인을 통하여 금이나 은보다도 비싼 값으로 구입하였다. 중국에는 육조시대(六朝時代)에 인도에서 바로 전해졌다고도 하고, 한나라 때 서역의 호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장건(張騫)이 비단길을 통하여 가져왔다고도 한다.
호초라는 명칭도 호나라에서 전래된 초(椒)라는 뜻이다. 이리하여 후추는 동양과 서양을 가릴 것 없이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입맛을 돋우는 향신료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파한집』에서 처음 그 명칭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 중엽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고, 송나라와의 교역으로 도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한 원나라 때의 선박에서도 후추가 발견되었다.
또, 『고려사』에는 1389년(공양왕 1)에 유구(琉球)의 사신이 후추 300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남방에서도 직접 후추가 도입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후추는 수입품이었기에 매우 귀중한 물품으로 취급되었다. 『징비록(懲毖錄)』에 수록된 후추의 일화를 보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후추를 선호하였고 귀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선조 때 일본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의 일로서 당시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는 조선 침략의 야심을 품고 사신들에게 우리나라의 사정을 염탐하게 하였다. 서울로 오는 도중 침략에 대한 아무런 대비가 없는 지방의 실정을 본 그들은 온갖 오만불손한 언행을 일삼았으나 외국의 사신이었던만큼 서울에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동평관(東平館)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술잔이 돌고 흥취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사신은 후추를 꺼내어 술좌석에 마구 뿌려댔다. 그러자 자리를 같이한 벼슬아치, 거문고를 타던 악공, 춤추고 노래하던 기생 할 것 없이 서로 다투어 후추를 줍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일본의 사신은 관리들의 규율이 이렇듯 문란하니 이 땅을 침략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라 생각하고 침략의 야심을 굳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후추는 매우 귀중한 것이었기에 일부 특권층에서만 이용되었으며, 대부분의 서민은 천초(川椒: 초피나물)·겨자·마늘 따위를 향신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한방에서는 후추가 온중(溫中)·건위(健胃)·구풍(驅風)·발한(發汗)의 효능이 있다고 하여 소화불량·위허약·번위(反胃)·구토·하리(下痢) 등의 증상에 약재로 이용하였다.
성분으로는 피페린(piperine)이 5∼5.5% 들어 있고, 차비신(chavicine)이 6% 내외, 정유가 1∼2.5% 들어 있다. 성숙하기 전의 열매를 건조시킨 것을 후추 또는 검은 후추라 하고, 성숙한 열매의 껍질을 벗겨서 건조시킨 것을 흰후추라 한다. 맛과 향은 검은 후추가 강하다. 주로 가루를 내어 이용하며, 통으로 이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