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림산업은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의 아파트 분양을 앞두고 ‘e-편한세상’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이전의 ‘대림 아파트'를 ‘e-편한세상’으로 바꾼 것이다. 단지 바로 뒤로 야산을 끼고 있다는 점에 착안, 공원 안에 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파트를 부각시키기 위해 고심한 결과였다.
아파트 이름, 건설사 이름대신 브랜드를 입다
1 e-편한세상 2 푸르지오 3 자이
같은 해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업계 처음으로 ‘래미안’이라는 아파트 브랜드(BI) 선포식을 열고 본격적인 브랜드시대를 열었다. 2500여 개의 외국어를 밀어내고 당선된 것은 미래지향적(래)이고 아름답고(미) 안전한(안) 아파트라는 뜻의 래미안. 래미안 시대의 장자는 수원시 장안구 천천동에 분양한 ‘수원 천천(율전2차 래미안) 래미안’아파트였다. 공급면적 86㎡, 114㎡ 중형아파트 876가구로 구성된 이 아파트는 삼성아파트라는 이름 대신 래미안이라는 브랜드를 입고 2002년 4월 입주했다. 대림아파트와 현대아파트, 삼성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은 이제 ‘e-편한세상’과 ‘힐스테이트’, ‘래미안’에 산다. 지금이야 주소가 ‘롯데캐슬’이나 ‘타워팰리스’라는 대답이 어색하지 않지만 아파트 브랜드가 지금처럼 자리 잡은 지는 채 10년이 안 된다.
가장 먼저 브랜드 아파트를 분양한 대림산업이 ‘e-편한세상’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이렇다. 지금은 김포한강신도시나 광교신도시 등 수도권의 대형택지지구 내에 건폐율(전체 사업지 면적 중 건물을 짓는 면적의 비율)이 40%대인 널찍한 단지들이 등장하지만 당시만 해도 용적률 50%대인 아파트 단지가 드물었다. 대림산업은 동간 간격이 넓고 녹지가 많은 자연친화적인 단지에 ‘편한 세상을 경험(Experience)한다’는 브랜드를 입혔다. 사업부지를 13개로 나눠 필지당 19가구씩 따로 사업승인을 받은 덕에 아파트 단지면서도 고급빌라 같은 느낌을 주도록 지었다. 188~294㎡ 대형평형으로 구성된 232가구의 작은 단지로, 2001년 10월 입주했다. 하지만 아파트에 브랜드를 도입하겠다고 선포한 곳은 삼성물산으로 알려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함흥냉면이나 춘천닭갈비처럼 아파트 브랜드도 원조 경쟁이 치열하다. 특허 등록날짜가 먼저냐, 대중에 공개한 시점이 먼저냐로 아웅다웅하지만 건설업계에서는 대부분 이들 2개 사의 브랜드가 2000년도 이후 브랜드경쟁시대를 열었다고 본다. 상표권은 래미안이 1999년10월26일에 출원해, 2000년1월13일 상표권을 출원한 e-편한세상보다 석 달 가량 빠르다.
브랜드 무한경쟁 시대
<시대별 아파트의 브랜드 변화>(대한주택공사, 2000)에 따르면 1990년대 후반에는 삼성사이버아파트(1999), 삼성중공업의 쉐르빌(1999), 주상복합 브랜드인 타워팰리스, 가든스위트 아크로빌(이상 2000)등 브랜드가 무더기로 쏟아졌다. 브랜드 무한경쟁 시대를 연 계기는 1998년의 분양가 자율화였다. 분양가를 건설사가 정할 수 있게 되면서 다양한 품질과 가격의 아파트가 나왔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건설사 이름 이상의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이전에도 압구정 현대아파트(1975), 부산 럭키동래아파트(1986)등 건설사 이름을 붙인 아파트들은 있었지만 건설사 이름이 쏙 빠진 브랜드의 등장은 처음이었다. 브랜드의 파워는 생각보다 강했다. 삼성중공업의 ‘쉐르빌’은 2001년 한국능률협회의 브랜드 파워 평가 주택부문에서 내내 왕좌를 지켰던 ‘현대아파트’를 밀어내고 1위에 올랐다. 한 소절만 들어도 아 무슨 아파트, 라고 떠올릴 정도로 귀를 사로잡는 짧은 ‘징글’송도 등장했다. 특허청에 따르면 아파트를 포함한 건설업 관련 특허등록건수는 2000년 초 연간 1400건에서 2002년 1600건, 2003~2005년에는 매년 2000건을 웃돌았다. 2007년 기준 시공능력평가 100위권 이내 건설사 중 주택을 짓는 91개 건설사가 브랜드를 1개 이상씩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의 저자는 “1970년대 이후 아파트에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계층의 분화를 가져왔다면 2000년대 이후 현재는 브랜드 아파트에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사회적 계층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됐다”고 말한다. 브랜드를 만들기 전에 지은 아파트에서 ‘개명신청’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브랜드냐에 따라 집값이 좌지우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7년에는 서울 동작구 롯데낙천대 아파트 입주자들이 외관 페인트칠 공사를 하면서 ‘롯데캐슬’로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브랜드 아파트라는 ‘지위’를 얻게 된 사람들은 그 나름의 단지라는 개성도 원한다. 래미안 에버하임, 롯데캐슬 골드로즈 등으로 브랜드는 유지하되, 단지만의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이름은 날로 길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