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닭인 붉은멧닭. 오늘날 닭의 조상으로 추정된다./Science
상가 곳곳에 자리 잡은 치킨집에서 알 수 있듯 닭은 인류 최대의 단백질원이다. 지역이나 종교 상관없이 전 세계 어디서나 닭고기를 즐긴다. 전 세계에서 키우는 닭은 약 240억 마리로 사람 한 명당 세 마리꼴이다. 과연 닭은 언제부터 가축이 돼 인류를 먹여 살린 것일까.
과학자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닭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2세기 넘게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닭의 가축화 시기를 밝혀냈다. 중국과학원 쿤밍 동물학연구소의 야-핑 장 박사 연구진은 지난 24일 국제학술지 ‘셀 리서치’에 “9500년 전 무렵 동남아시아 북부와 중국 남부에 살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붉은멧닭을 길들여 전 세계로 퍼뜨리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까지 고고학 증거를 바탕으로 닭이 중국 북부와 인도 인더스강 유역에서 가장 먼저 사육했다는 주장과 완전히 다른 결과이다. 연구진은 이번에 오늘날 닭의 조상은 붉은멧닭의 아종(亞種)인 ‘갈루스 갈루스 스파디세우스(Gallus gallus spadiceus)’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가축이 된 닭의 학명은 ‘갈루스 갈루스 도메스티쿠스(Gallus gallus domesticus)’이다.
붉은멧닭은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히말라야산맥이 있는 파키스탄 산악지역까지 5종류가 산다. 다윈은 인도가 닭의 출발지라고 생각했다. 과학자들은 다윈의 생각을 좇아 유적지에서 발굴한 닭뼈를 근거로 9000년 전 중국 북부, 그리고 4000년 전 파키스탄에서 사람들이 닭을 길들이기 시작했다고 추정했다.
이번 연구진은 DNA 증거로 지금까지 생각을 뒤집었다. 연구진은 지난 20년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120여 마을에서 다양한 토종닭과 근처에 사는 야생닭을 수집했다. 붉은멧닭의 5개 아종 외에 녹색멧닭, 회색멧닭, 실론멧닭도 채집했다. 연구진은 이렇게 수집한 863마리의 유전자를 완전히 해독했다.
유전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 비율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이를 서로 비교하고 역으로 추적하면 진화 경로를 알 수 있다. 그 결과 닭은 지금의 미얀마와 라오스, 태국, 중국 남부에 살던 닭과 야생닭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닭 가축화의 중심지. 중국 과학자들은 DNA 분석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7500년 전 지금의 미얀마, 라오스, 태국 등지에서 처음으로 닭을 길들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Science
공동 저자인 영국 노팅엄대의 올리버 하노트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이 지역이 닭 가축화의 중심지”라고 밝혔다. 연구진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도 기원설에 대해 동남아시아에서 처음 길들인 닭이 나중에 인도 고유의 붉은멧닭과 다시 교배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결과는 4500년 전 동남아시아에서 벼농사와 기장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닭의 가축화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농민들이 닭을 가축으로 키운 게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하노트 교수는 “인간이 닭은 길들이게 된 계기를 이해하려면 고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연구소의 멀린다 제더 박사도 “닭의 가축화와 전파는 좀 더 복잡한 경로로 추정된다”며 “유전학과 고고학 증거를 결합해야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길들인 야생닭은 지금 닭보다 훨씬 날씬하고 알도 덜 낳았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닭은 처음엔 고기나 알보다는 장식용 깃털이나 투계(鬪鷄)를 위해 길들였을지 모른다고 추정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투계용 닭의 거래가 수지맞는 사업이 되면서 전 세계로 닭이 퍼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도 나온다. 미국 위스콘신대의 조너선 키노여 교수는 닭이 동남아시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에 대해 “지금 닭이나 야생닭의 게놈은 닭의 초기 진화에 대해 제한적인 증거만 제공한다”며 “그들에게는 당시 닭의 DNA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닭이 과학자들에게 주목받는 것은 닭이 인류 문명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이제 닭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연간 전 세계에서 닭고기가 1억톤씩 소비된다. 달걀도 1조 개가 팔린다. 닭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다.
닭은 대체불가능한 자원이다. 만약 닭고기를 소고기로 대체하면 사육면적이 10배나 더 필요하다. 사료는 8배 더 들며, 그 결과 온실가스 배출도 4배 증가한다. 닭을 모두 돼지로 대체한다면 지금보다 돼지가 10억~20억 마리는 더 필요하다. 돼지는 같은 무게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닭보다 먹이를 14%나 더 먹는다.
닭이 사라지면 경제력이 약한 저개발 국가 사람들은 당장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닭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어디를 가도 길거리 음식으로 인기가 있다. 닭고기나 달걀에는 인체가 합성하지 못하는 라이신과 트레오닌 같은 필수 아미노산이 들어 있다.
닭은 사람 생명도 살린다. 녹십자의 화순 백신공장에서 유정란에 독감 바이러스를 자동으로 주입하는 모습./녹십자
닭이 없으면 심지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한 해 전 세계에서 필요한 4억명 접종분의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을 만들려면 달걀이 필수적이다. 바이러스를 달걀에 접종하고 거기서 단백질 성분을 정제해 백신으로 쓰기 때문이다. 동물세포에 바이러스를 키우는 방법도 개발됐으나 아직 유정란(有精卵) 생산법이 주축이다.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위기를 맞았듯, 닭 역시 바이러스의 공격에 흔들리고 있다. 철새 사이에 퍼지던 조류 인플루엔자가 닭에게 감염되면서 엄청난 수가 살처분되고 있다. 10여년 전 아시아를 휩쓴 조류인플루엔자(AI)로 닭이 1억 마리 이상 살처분됐다. 5년 전 미국에서도 조류인플루엔자로 4000만 마리 이상이 살처분됐다. 닭이 사라지면 인류도 위험해지는 만큼 강 건너 불구경해서는 안될 일이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ywlee@chosun.com]
백신 만드는데.. 닭이 필요하다니 몰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