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인류가 비누를 사용해 온 역사는 매우 길지만, 오랫동안 비누는 상류층만 사용하는 사치품에 불과했다. 이러한 한계는 18세기 프랑스 화학자 르블랑에 의해 돌파되었다. 1775년에 과학아카데미는 세탁용 소다에 대한 공모과제를 내걸었고, 르블랑은 1789년에 세계 최초로 인공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르블랑 공법은 19세기 전반에 세탁용 소다를 생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비누의 대중화와 공중보건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그 후 1863년에는 솔베이 공법이 등장하여 르블랑 공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비누는 때를 씻어내는 데 쓰는 세정제로 그 어원은 “더러움을 날려 보낸다.”는 뜻의 비루(飛陋)라고 한다. 인류가 비누를 사용해 온 역사는 매우 길지만, 오랫동안 비누는 상류층만 사용하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비누가 대중화되는 데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 소다 제조법을 개발한 프랑스 과학자인 르블랑(Nicolas Leblanc, 1742년~1806년)의 역할이 컸다.
비누를 찾는 아기를 표현한 광고(1889년)
기름과 재의 만남
비누는 기원전 2800년경에 바빌로니아인들이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바빌론의 유물을 발굴할 때 비누와 유사한 재료를 담고 있는 진흙으로 만든 원통이 발견되었고, 원통의 측면에 기름과 재를 섞어 비누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고기를 불로 구워서 먹기 시작한 후에 기름과 재가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그것이 비누의 탄생으로 이어졌던 셈이다.
비누를 사용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이집트의 고분 벽화
고대 로마인들은 사포(Sapo)라는 언덕에 재단을 만든 뒤 양을 태워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제사가 끝난 후 청소를 맡은 사람이 타고 남은 재를 집으로 가져와 물통에 집어넣었고, 이 물통에서 걸레를 빨던 그의 아내는 때가 쏙 빠지는 것을 발견했다. 물통에 던져진 재 안에 양이 타면서 녹은 기름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로마인들은 이러한 기름 재를 사포라고 불렀고, 그것이 오늘날 ‘솝(soap)’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유명한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비누(사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비누는 갈리아 인들이 만들어냈다. 그들은 비누를 사용해 윤기가 도는 붉은색 머릿결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비누는 유용한 것이다. 비누는 동물의 기름과 재로 만든다. 특히 염소의 기름과 너도밤나무의 재가 비누 재료로 가장 좋다. 비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액체 비누이고, 또 하나는 고체 비누다. 게르마니아 인들은 여성보다 오히려 남성이 비누를 더 많이 사용한다."
중세에 들어서는 기름과 재를 섞는 방법 이외에 새로운 비누 제조법이 시도되기도 했다. 8세기에 사보나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의 지역에서는 올리브와 해초 기름을 사용하여 비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12세기에는 잿물 대신에 천연 소다(탄산나트륨의 속칭)를 사용하여 새하얀 비누를 만드는 방법이 개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리브나 천연 소다는 매우 귀한 것이었고, 비누 대중화의 길은 멀기만 했다.
과학아카데미의 공모과제
인공소다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방법을 최초로 개발한 르블랑
르블랑은 파리외과대학을 졸업한 후 의사로 활동하다가 화학자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화학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의 새로운 화학이 ‘프랑스 과학’으로 불릴 정도였다. 르블랑은 당시의 유명한 화학자인 장 다세(Jean Darcet) 밑에서 화학을 공부했는데, 다세는 오를레앙 공작(Duke of Orléans)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1780년에 르블랑은 오를레앙 공작의 상임 외과의사가 되면서 화학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5년 뒤에 오를레앙 공작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르블랑은 과학 실험실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르블랑은 화학을 통해 부와 명예를 확보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웠다. 그는 1781년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결정의 성장에 대한 논문을 보고하면서 화학자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곧이어 파리에서 7.5미터의 높이로 쌓아둔 석탄 더미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르블랑은 석탄의 자연발생적인 연소를 방지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다.
과학아카데미는 논란이 되거나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을 때 공개경쟁의 형태로 해결책을 찾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1775년에 과학아카데미는 소금(염화나트륨)으로 세탁용 소다(탄산나트륨)를 만드는 최선의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1만 2천 리브르의 상금을 준다는 공모를 내걸었다. 오늘날의 가치로 따지면 약 6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당시 루이 16세는 프랑스 섬유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민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세탁 소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르블랑 공법의 탄생
1775년의 공모과제에 대한 답은 10년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고, 급기야 세탁 소다는 ‘흰색 금(white gold)’이라는 별명도 가지게 되었다. 르블랑은 1784년에 42세의 나이로 세탁 소다를 만드는 방법에 도전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어떤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염화나트륨에다 당시에 쉽게 구할 수 있던 황산을 섞어 황산나트륨과 염화수소(염산)를 만들었다(2NaCl + H2SO4 → Na2SO4 + 2HCl). 염화나트륨은 매우 안정된 물질이지만, 황산나트륨은 반응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탄산나트륨으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물질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황산나트륨에서 탄산나트륨으로 가는 두 번째 단계였다. 르블랑은 철을 만들던 사람들이 목탄으로 탄소를 공급한 것에 주목하여 황산나트륨을 목탄으로 가열하는 실험을 실시했다. 그러나 원하는 탄산나트륨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는 5년 동안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온갖 시도를 해 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르블랑은 목탄과 함께 석회석(CaCO3)을 첨가하여 황산나트륨으로 검은 재(black ash)를 만들었는데, 그 재가 바로 탄산나트륨을 함유하고 있었다(Na2SO4 +CaCO3 + 2C → Na2CO3 + CaS + 2CO2). 이른바 르블랑 공법(Leblanc process)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르블랑을 포함한 당시의 과학자들은 석회석이나 탄산나트륨과 같은 물질의 화학적 분자식도 알지 못했다.
르블랑 공법의 개념도
1789년에 르블랑은 장 다세에게 자신이 이룬 놀라운 발명을 털어놓았다. 실험을 통해 르블랑의 발명을 재차 확인한 다세는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선언했다. “프랑스왕립대학과 과학아카데미의 교수인 서명자는 … 이것과 똑같은 공법으로 쉽게 공장을 세울 수 있다고 보증합니다.” 르블랑은 1790년에 오를레앙 공작의 지원을 바탕으로 파리 외곽의 생드니에 인공 소다를 생산하는 공장을 차리고 ‘르블랑의 소다 공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어 1791년에 프랑스 정부는 르블랑 공법에 대한 특허를 부여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시에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르블랑은 흰색 금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구체제가 몰락하는 바람에 1만 2천 리브르의 상금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1793년에는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을 당하면서 르블랑의 공장도 몰수되었다. 급기야 공안위원회는 르블랑에게 “진정한 공화주의자라면 인공 소다 제조법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르블랑은 자신의 상금과 공장과 특허를 모두 잃고 말았다.
르블랑은 혁명 기간과 나폴레옹 집권기 내내 수많은 관료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르블랑은 1800년에 자신의 공장을 되찾았지만, 그것을 완전히 가동시키지는 못했다. 그 밖의 재산상의 권리는 모두 기각되었고, 결국 르블랑은 1806년에 머리에 총을 쏴 자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856년에 과학아카데미는 “르블랑만큼 프랑스 산업에 큰 기여를 하고서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르블랑 공법은 19세기 전반의 50년 동안 인공소다를 생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당시의 비누, 섬유, 유리, 제지 산업이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실상 19세기 후반에 인공염료가 개발될 때까지 르블랑 공법은 화학공업과 동의어로 통했다. 르블랑 이전에는 소규모 가내 공장에서 옛날의 비법에 따라 화학물질을 만들어 판매했지만, 르블랑 이후에는 화학물질이 대규모 기계 공장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적으로 거래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명한 독일의 화학자인 리비히(Justus von Liebig)는 “한 국가가 소비하는 비누의 양은 그 문명의 척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르블랑 공법으로 소다를 생산하는 공장의 모습
비누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다
르블랑 공법은 생산되는 소다만큼이나 많은 오염물질을 만들어냈다. 1톤의 세탁 소다가 만들어질 때마다 염화수소 기체 0.75톤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었고, 염화수소는 염산으로 변모해 산과 들판을 오염시켰다. 공장 주위에는 수만 톤의 황 화합물이 쌓였으며, 수로로 쏟아져 들어간 염산은 달걀 썩는 고약한 냄새를 퍼뜨렸다. 이른바 ‘르블랑 오염(Leblanc pollution)’이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르블랑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염화수소 기체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속에서 화학물질이 든 통을 휘저었다. 그들의 이는 부식되었고, 옷은 누더기가 되었다. 염화수소 기체를 깊이 들이마셔 정신을 잃거나 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르블랑 오염이 사람의 목숨도 앗아가기 시작하자 소다 제조업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물색했다. 염화수소 기체를 밀봉해서 수송하는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고, 굴뚝을 높이 세워 유독 기체를 멀리 날려 보내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르블랑 오염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면서 비누는 대중화의 시대에 진입했다. 비누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규칙적으로 씻기 시작했고, 세탁 가능한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비누가 당시 공중보건의 주요한 문제이던 옴(개선충이 피부에 기생하여 생기는 병)을 예방해주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국 정부가 1853년에 비누에 부과했던 세금을 폐지하면서 비누 가격이 대폭 하락하자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옴 환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기간에 나이팅게일의 위생법이 채택되어 병사들의 감염 위험이 크게 낮아지기도 했다.
1863년에 벨기에의 공업화학자 솔베이(Ernest Solvay, 1838년~1922년)는 소금과 석회석으로부터 오염 물질을 생성하지 않고 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일명 ‘암모니아 소다법’으로 불리는 솔베이 공법(Solvay process)은 매개 물질로 황산 대신에 암모니아 화합물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 후로 르블랑 공장은 속속 문을 닫기 시작하여 1918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솔베이는 암모니아 소다법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으며, 생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20세기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솔베이 회의(Solvay Conference)도 그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개최된 행사였다.
1927년에 개최된 제5차 솔베이 회의 때 찍은 사진20세기 물리학을 이끈 플랑크, 마리 퀴리, 로렌츠, 디랙,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파울리, 보어 등이 모두 모여 있다. 참석자 29명 중 17명이 노벨상을 받았으며, 여성으로는 마리 퀴리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