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 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 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겠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 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 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 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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