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명재상 ´안영´ | 역사인물 산책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 안영은 군주의 비위를 맞추기만 하는‘예스 맨’이 아니었다.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려 올바로 간언하는 재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우회적인 방법으로 임금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슬기를 발휘했다.
도광순 동방학 연구소장 한양대명예교수 ..............................................................................................................
춘추시대,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극도로 타락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했던 사회를 꼽을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역사의 한 무대다. 이때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긴 주(周)나라의 권위가 쇠퇴하고 유력 제후국이 패권을 추구하던 시기(BC 722~403)로 중국 사회는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서도 도덕적 양심과 지성을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제(齊)나라의 재상인 안영(晏영)이다. 그의 덕에 대해서는 공자도 ‘논어’에서 찬양한 바 있다.
안영은 제나라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등 3대의 군주에 걸쳐 명재상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특히 범용(凡庸)한 군주였던 경공이 58년이나 제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안영의 공을 빼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의 행적은 ‘안자춘추(晏子春秋)’와 ‘춘추 좌씨전(春秋左氏傳)’에 잘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저서 ‘사기’에다 안영을 위한 열전을 마련하여 그의 덕을 찬양했다.
“내가 그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그의 마부가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겠다.” 한마디로 안영은 임금의 부족함과 그릇됨을 충성된 마음으로 간(諫)해 절대 권력자인 왕을 올바로 인도해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재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