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임진왜란 중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맡으며 피난 다니는 조정을 이끌고 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 자리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물러서거라."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궐하여 돌아오는 길이었다. 임금 다음으로 지체가 높은 영의정 대감의 행차인지라 앞서가는 하인의 외침만큼이나 위세가 당당했다. 백성들이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이날은 운이 나빴던지 조그만 사고가 생겼다. 얼굴에는 꽤 주름살이 잡혀 있으나 꼬장꼬장해 보이는 한 여인이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다가 미처 길을 피하지 못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성미 급한 하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곧 한 하인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여인이 이고 있던 광주리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팔다 남은 것인 듯 참외 몇 개가 우르르 나뒹굴었다. 하인이 다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런 무엄한, 어서 냉큼 물러가지 못할까." 대감은 끼어들기 싫어서 먼 하늘만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서 가자고 그냥 피해 갈 것을 조용히 지시했다. 집에 돌아온 대감은 하인들을 불러 모아 눈물이 쑥 빠지도록 야단을 쳤다.
"너희가 한 가지라도 잘못을 하면 그 잘못은 곧 내 잘못이 된다. 내가 정승이니 백성 누구라도 억울함을 당하면 그 원망이 누구에게 돌아오겠느냐? 바로 내가 아니겠느냐?" 하인들을 집합시켜 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