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 15일 환희, 감격의 서울, 그리고 눈물바다. 전 세계가 놀란 날이었다. 북한에서 비행기가 날아오고, 사람들이 오고, 또 우리가 그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가고. 꿈만 같던 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50년 고인 회한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 낸 서울과 평양은 잠들지 못했다.
오열, 50년 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지는 순간 혈육의 정을 이념도 뛰어 넘지는 못했다. 그리고 통곡으로 꽉 찬 컨벤션센타는 감격의 물결로 큰 파도를 일으켰다.
빛 바랜 사진을 들고 오열하는 이산 가족들, 차라리 울음이라도 터트릴 수 있는 가족은 행복하다. 시원하게 눈물이라도 쏟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지 도 못한 다른 이산가족들과 탈북자 가족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상봉에 눈시울을 적시며 그리움만 태웠다.
문득 혈육의 정이 바람처럼 불어온다.
아버지의 형제간 중 한 분 계신 작은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공연히 아버지의 막연한 그리움이 혈육에 대한 애잔한 정으로 쏟아졌다. 작은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 유일하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분이다.
˝ 작은 엄마, 아버지는 북에도 안 계시나봐요. 다른 사람들은 다 찾는데 아무 연락이 없는 것 보면.˝
˝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 생각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확실해요?˝
˝ 글쎄. 그 때 당시 잡혀가서 목포 형무소에 계시다가 모두 바다에 수장을 시켰다고 하는데 우리가 보지 않았으니 모르지.˝
작은어머니도 시집오기 전 일이라 잘 모르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한 말을 대신했다.
아버지, 한번도 불러 본 기억이 없어 무척 낯선 말이다. 처음부터 계시지 않아 내게는 필요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많은 사람들의 빛 바랜 사진을 보니 내 앨범 어딘가에 도 꽂혀 있는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원호 대상자에게 박수를 쳐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나는 육이오 때 전사했다고 손을 들어 동정의 박수를 받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또 연좌제 관계로 출세를 못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행방불명이라는 것도 숨겼다. 누가 정보기관에 취직이라도 하려면 친인척은 물론 외가 쪽까지 신원조회가 들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누가 내놓고 이북에 있다고 하며 또 행방불명이라고 하겠는가. 나도 모르는 일이니 차라리 전사했다고 하는 것이 마음은 편했다.
모두가 비극이다. 그러나 북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지언정 살아 계셔 나를 찾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어머니가 반세기 동안 수절하고 2 년 전에 돌아 가셨다고 전할 아버지가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할까. 나도 한번 아버지라고 큰 소리로 불러 보고 싶다. 아버지! 역시 목이 메인다.
아버지 생각에 작은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불러도 불러도 갈증이 오는 그 이름 아버지.....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추억담을 제사 때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들려주었다.
˝ 형님은 똑똑한 분이었지. 그 시절에 축음기나 아코디온을 가지고 있는 집이 별로 없을 땐데 어디서 구해 오는지 정말 멋쟁이셨다. 글씨도 명필이고. 형님이 명령만 내리면 우리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복종했으니까. 그만큼 리더쉽이 강했고 잘 생기셨지.˝
예전에는 먼 이야기처럼 들리더니 요즈음은 가슴 한구석을 톡톡 치며 내 안으로 스며든다. 그리고는 아픔이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지금 77세다. 남자 나이로는 한창 나이다. 청년 시절을 세월에 다 빼앗기고 주름이 깊이 패인 자식일지라도 어머니 눈에는 아기요, 쑥스러워 손을 잡지 못해도 부인의 눈에는 첫정이 살아 있는 남편일 것이다.
누가 50년의 세월을 가로막았는가. 그리고 왜 못 만나는가.
주름진 가족들의 상봉 장면을 보면서 내가 만약 저 자리에서 아버지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딸 하나를 이 세상에 떨쳐 놓고 간 아버지는 또 무슨 말을 내게 할까. 생각만으로도 금방 가슴이 아려 말문이 막혀 버렸다. 단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며 가슴을 칠 수밖에 없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