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은 여든네 살까지 살면서 미국 최고의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저술가, 비즈니스 전략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가장 심오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실용적인 정치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날리기를 통해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번개에 대처하기 위해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복초점 안경, 고효율 안경, 멕시코 만류 도표, 흔한 질병인 감기의 전염성에 대한 이론 등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출 도서관, 대학교, 의용 소방대, 보험 협회, 동액 보조 등 다양한 도시 발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또한, 미국 특유의 소박한 유머 스타일이나 실용주의 철학의 탄생에 일조하기도 했다. 외교 정책 면에서는 힘의 균형을 꾀하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결합 방식을 개발했으며, 정치 분야에서는 식민지 연합과 단일 정부를 위한 연방 모델을 제안하는 생산적인 기획안을 구상했다. 그러나 프랭클린이 발명한 것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끊임없이 재창조된 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월터 아이작슨
독학으로 공부하고 인쇄업자로 성공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706년 1월 17일에 아메리카 식민지의 보스턴에서 조사이어 프랭클린과 어바이어 폴저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사이어는 수지를 이용해 비누와 양초 만드는 일을 했으며, 자녀를 다섯이나 둔 상황에서 상처하고 재혼해서 자녀를 여덟이나 더 낳았다. 벤저민은 이 대가족에서 13남매 가운데 10번째였고,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이렇게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태어난 막내의 경우, 가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먹고 살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프랭클린의 정규 교육은 8세 때부터 2년간 학교에 잠깐 다니며 읽고 쓰기와 산수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그가 터득한 지식은 모두 책이나 경험을 통한 독학이었다. 프랭클린은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한 까닭에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자면 기성 학문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은 까닭에 항상 자유롭고 참신한 시각을 유지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프랭클린은 어떤 일에서나 심오한 이론보다는 실용적 가치를 더욱 중요시했다.
벤저민은 10세 때부터 아버지의 도제로 일했고, 12세 때에는 친형 제임스의 도제로 들어갔다. 하지만 16년의 나이 차가 있는 이들 형제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시 제임스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뉴잉글랜드 커런트>라는 신문을 발행했는데, 벤저민은 이 신문에 ‘사일런스 두굿’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차례 투고해서 인기를 끌었다. <커런트>가 반정부적인 기사로 인해 탄압을 받고 설상가상으로 형과의 다툼이 심해지자, 벤저민은 1723년에 필라델피아로 거처를 옮겨 그곳의 한 인쇄소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이듬해에 프랭클린은 새로운 인쇄소를 창업하자는 어느 후원자의 제안으로 기자재를 구입하러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그러나 후원자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트리자 한동안 그곳의 인쇄소에서 일하며 외국의 문물을 접한다. 2년 만에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프랭클린은 머지않아 인쇄소를 직접 차리게 되었으며, 성실한 태도와 뛰어난 실력으로 금세 성공을 거둔다. 그는 훗날 과학과 정치 분야의 명사가 된 뒤에도 유언장에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 벤저민 프랭클린”이라고 적었을 만큼 그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인쇄업으로 부와 명성을 얻은 프랭클린은 절친한 친구들을 모아 ‘준토’라는 사교 모임을 결성했으며, 여기서 오간 진지한 논의를 확장시켜 지역사회를 위한 도서관과 소방대와 대학교 등을 설립했다. 17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인수해서 발행인이 되었으며, 1743년에는 미국 철학회를 결성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나아가 그는 민병대의 창설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때까지 개별 식민지로 분열되어 있었던 아메리카를 하나의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구상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번개가 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연을 날리는 프랭클린. 그는 운이 좋았지만 이후에 이 실험을 재연하던 사람 중에는 상당수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위험한 실험이었다.
42세 때인 1748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은 사실상 사업에서 은퇴했으며, 이후로는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여러 가지 분야의 관심사를 추구했다. 84년에 달하는 그의 인생에서 이 후반기야말로 가장 큰 영광과 명성을 얻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가 추구한 관심사로는 우선 과학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역시나 본인의 성격에 걸맞게 지극히 실용적인 측면에서의 연구였다. 가령 이전의 난로에 비해 열효율을 크게 높인 일명 ‘프랭클린 난로’의 발명이 그러했으며, 번개와 전기의 관계를 탐구한 유명한 실험도 그러했다.
전기에 대한 프랭클린의 관심은 17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양전하’와 ‘음전하’를 비롯해서 ‘전지(배터리),’ ‘충전,’ ‘(전기적) 중성,’ ‘도체’ 등의 전기 관련 용어도 대부분 프랭클린이 처음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번개가 전기의 일종이라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커다란 연에 금속 막대를 달고 하늘에 띄워서 구름에서 전하를 이끌어내는 실험을 고안했다. 이 실험이 실제 벌어졌는지 여부를 놓고 논란도 있었지만, 지금은 1752년 6월에 프랭클린이 실제로 연을 날린 것으로 간주된다.
이 실험이 두고두고 격찬을 받는 까닭은 단순히 그 통찰 때문만이 아니다. 번개와 전기의 유사성은 뉴턴을 비롯한 여러 과학자가 이미 예견한 바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프랭클린처럼 위험천만한 실험에 도전하는 모험심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이 실험의 결과로 생산된 피뢰침이 널리 보급되었다는 사실도 “어떤 용도로도 쓸 수 없는 철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프랭클린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잘 보여준다. 이후 프랭클린은 “번개를 복종시킨 인물”로 유럽에까지 널리 명성을 떨쳤다.
그 외에도 프랭클린은 여러 가지 발명품을 내놓았다. 지금도 널리 사용되는 복초점 안경(일반 렌즈와 돋보기 렌즈를 안경테에 함께 끼운 것)을 만들었고, 유리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러 소리를 내는 원리를 이용한 악기 ‘아모니카’도 만들었으며, 소문난 애서가답게 “높이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본 후 다시 꽂을 수 있는 기계 팔”도 만들었다. 또한,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의 원인 규명에도 관심을 보여서, 외교 임무차 아메리카와 유럽을 오가는 배에서도 파도나 해류에 관한 실험에 몰두했을 정도였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 당시에 식민지의 단결을 호소하며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에 수록한 프랭클린의 유명한 구절. 조각난 뱀의 몸뚱이마다 적혀 있는 알파벳은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니셜이다.
식민지의 대변자에서 미국 독립의 영웅으로
프랭클린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변자이며 혁명의 주도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질서와 실용을 좋아했던 그의 성향은 오히려 온정적 보수주의자에 해당되었다. 원래 프랭클린은 아메리카가 계속해서 영국의 식민지로 남기를 바랐다. 그의 적수는 영국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식민지를 좌지우지하는 일부 독점 세력뿐이었다. 그러나 독점 세력의 횡포를 다스려 달라는 호소에 영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반응하자, 이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독립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을 뿐이다.
한동안 펜실베이니아 의회의 서기로 일했던 프랭클린은 1751년에 처음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무대에 나섰다. 1753년에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을 앞두고 인디언 지도자들과의 동맹 회담에 참석했고, 영국 정부에 의해 식민지 전체를 관장하는 체신장관 대리로 임명된다. 이듬해 5월에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식민지군이 프랑스군에 패배하자, 프랭클린은 식민지의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유명한 구호를 신문에 게재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민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올버니 회의에서 프랭클린은 연방 대의원회의 구성과 연방 대통령의 지명을 핵심 내용으로 삼는 선구적인 안건을 제시했지만, 각 식민지 의회와 영국 의회 모두의 거절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757년에 프랭클린은 식민지 대표 자격으로 독점 세력의 횡포를 고발하러 영국으로 떠난다. 평소 식민지인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프랭클린은 정작 영국 정부가 식민지인을 일종의 2등 국민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영국 정치가들을 연이어 만나며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프랭클린은 과학자로 얻은 명성 덕분에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당대의 지식인을 만나고,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762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1764년에 다시 한 번 독점 세력 문제로 영국 출장을 떠난다. 이때 그는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를 하면 영국 의회에 식민지 대표도 있어야 한다는 선구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왕당파이며 뉴저지 총독으로 재직 중인 아들 윌리엄을 위해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770년 3월 5일에 보스턴 학살 사건, 1773년 12월 16일에 보스턴 차 사건, 1775년 4월 19일에 영국군과 식민지군 사이의 최초 무력 충돌이 발생하며, 독립을 향한 식민지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775년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최고령 대의원(당시 70세)으로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했으며, 이듬해에는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독립선언서 작성 5인 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선언서는 거의 제퍼슨의 초안대로 채택되었지만, 그 가운데 “자명한 진리”라는 유명한 구절은 프랭클린의 첨언이었다.
1776년에 프랭클린은 비밀 외교 임무를 띠고 프랑스로 떠나며 친손자와 외손자를 나란히 대동했다. “내가 죽으면 눈을 감겨 줄 자손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지만 그는 70대 중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1778년에 프랑스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동맹 조약을 성사시키고 이듬해에 전권대사가 되었으며, 미국 독립전쟁이 식민지의 승리로 끝나자 1782년에 영국 대표단과 평화 협상까지 담당했다. 당시 그는 일거수일투족이 파리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1785년 여름에 프랭클린은 신임 공사 토머스 제퍼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10년간 살던 프랑스를 떠나 이제 독립국이 된 미국으로 향했다. 축포와 환호성 속에 귀국한 프랭클린은 이제 워싱턴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1787년의 제헌 회의에서는 최고령자(당시 81세)에 대한 예우로 특수 제작한 가마를 타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이로써 프랭클린은 독립선언서(1776),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1778), 영국과의 평화 조약(1782), 미국 헌법(1787)에 모두 서명한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다.
집필 18년 만인 1788년에 비로소 [자서전]을 완성한 프랭클린은 1790년 4월 17일 밤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녀로는 딸 하나와 혼외관계로 얻은 외아들 윌리엄이 있었는데, 열혈 왕당파로 뉴저지 총독을 지낸 윌리엄은 줄곧 부친과 대립하다가 식민지가 독립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마침 윌리엄에게도 혼외관계로 얻은 템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 이 손자가 [자서전]의 정리와 출간 작업을 담당한 덕분에 이 유명한 책이 오늘날 전해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독서에 열중한 프랭클린을 묘사한 데이비드 마틴의 1767년 작 초상화. 책상에 놓인 것은 아이작 뉴턴의 흉상이다.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백악관의 그린 룸에서 민주당 의원들과 만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훔쳤고, 군주에게서 권위를 빼앗았다”
프랑스의 정치가 튀르고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2대 업적을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요약했다. “그는 하늘에서 번개를 훔쳤고, 군주에게서 권위를 빼앗았다.” 과학과 정치라는 양대 업적뿐만 아니라 워낙 여러 가지 방면에서 시대를 앞서 가고 유행을 선도했으므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세계 최초,” 또는 “미국(아메리카) 최초”라고 단언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야말로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미국 역사상 으뜸가는 팔방미인, 또는 르네상스맨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젊어서부터 머리가 좋기로 유명했으며, 말년에 이르기까지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노년의 너그럽고 여유로운 외모를 묘사한 초상화로 유명하지만, 젊은 시절에만 해도 그는 종종 남을 비판하고 빈정거린다는 이유로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은 20세 때에 첫 번째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앞으로의 삶을 위한 4가지 실천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준수했으며, 이후 인쇄업자로 성공한 다음에는 다시 한 번 자신이 평생지켜야 할 13가지 덕목을 선정해서 역시 철저하게 준수했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성실, 정의, 온건, 청결, 침착, 순결, 겸손이라는 각각의 덕목에는 “배부르도록 먹지 말라” “쓸데없는 말은 피하라,” “결심한 것은 꼭 이행하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등의 구체적인 실천사항이 있었고, 이행 여부를 확인하는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었다. 따라서 프랭클린의 인격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런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의 계획과 덕목은 오늘날까지도 각종 자기계발 이론의 근간으로 널리 전파되고 응용된다.
그의 저술로는 [자서전](1770~1788)이 가장 유명하며, 본격적인 자기계발 지침서의 원조로 손꼽힌다. 또 다른 대표작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은 그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책력에 ‘리처드 손더스’라는 필명으로 본인이 직접 만들거나 다른 출처에서 가져온 갖가지 금언과 서문을 덧붙여 매년 간행한 것으로 당대에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랭클린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명료하고 재미있는 문체를 구사했다. 심지어 영어 철자법도 간소화하자고 주장하며, 가령 wife를 yf로 쓰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이런 ‘가벼움’에 대해서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즉 인생에 대해서나 윤리에 대해서나 보다 깊은 차원의 고민까지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계몽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로서 프랭클린의 가치는 결코 쉽게 폄하할 수 없다. 가벼운 외양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의 주장에는 상당히 깊은 통찰이 들어 있곤 했다. 가령 1751년에 발표한 인구 증가에 관한 그의 논설은 훗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과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1798) 같은 보다 체계적인 저작에도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프랭클린의 시대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사실상 문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원자재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영국에 의존하고 수입하던 때에 프랭클린은 진취적인 정신과 실용적인 태도로 여러 방면에서 개척자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클린은 역대의 미국인 중에서도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생전에는 중앙 정부의 요직을 맡지 못했지만, 오늘날 역대 대통령들과 나란히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벤저민 프랭클린의 얼굴이 새겨진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벤저민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 1994; [프랭클린 자서전], 2001; [덕의 기술], 2004; 월터 아이작슨, [인생의 발견], 2006; 앨런 브링클리, [미국인의 역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