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비 -도종환-
마음 무거워 무거은 마음 버리려고 산사까지 걸어갔었는데요 이끼 낀 탑 아래 물봉숭아 몇 포기 피어 있는 걸 보았어요
여름내 비바람에 시달려 허리는 휘어지고 아름다운 제 꽃잎이 비 젖어 무거워 흙바닥에 닿을 듯 힘겨운 모습이었어요
비안개 올리는 뒷산 숲처럼 촉촉한 비구니 스님한 분 신발 끄는 소리도 없이 절을 돌아 가시는데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만 사랑하고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제가 지고 선 세속의 제 무게가 있는가봐요
내리는 비 한 천년쯤 그냥 맞아주며 힘에 겨운 제 무게 때문에 도리어 쓰러지지 않는 석탑도 있는 걸 생각하며
가지고 왔던 것 그대로 품어 안고 돌아왔어요 절 지붕 위에 초가을비 소리 없이 내리던 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