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심리학자들은 인간에게 놀이와 게임은 사회성 형성 과정에 필수적 활동이라 말한다. 누구나 놀이와 게임을 통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배우기 때문이다. 놀이와 게임에서 경쟁 상대는 반드시 이겨야 할 적수처럼 보이지만, 공통의 룰을 지켜야 하는 협조적 대상이다. 학창 시절 배우기 시작하는 논쟁도 마찬가지다. 상대는 반드시 제거돼야 할 적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놀이와 게임이 논쟁의 수준을 넘어 싸움이 되면 인간의 숨겨진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국가 간 전쟁은 인간의 무의식까지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서로 상반된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첫 번째 본성은 인간의 잔인한 공격성이다. 프로이트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5년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이란 제목의 글을 출간했다. 그는 부녀자, 어린이, 혹은 의료요원 같은 민간인만큼은 무참히 해치지 않으리라는 문명국가의 도덕규범에 대한 환상이 처절하게 무너졌음을 선포했다. 프로이트는 그저 동맹국의 요청으로 참전하는 전쟁을 통해 적(enemy)과 이방인(foreigner)이 같은 의미처럼 바뀌었다고 꼬집었다. 결국 그가 주목한 결론은 개개인의 무의식 가운데 숨어 있는 공격 본능이다. 누구나 낯선 타인을 적으로 낙인찍고, 적을 죽이거나 그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봉오동 전투>를 만든 원신연 감독은 최근 시사회에서 역사 자료를 통해 전쟁 중 일본군이 벌인 잔인한 행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영화에는 그중 일부만 보여주려 했다고 밝혔다. 일본군들이 민간인의 목을 베어 들고 신나게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이 그중 하나일 듯싶다. 프로이트의 진단이 정확해 보인다.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의 옷을 발가벗기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인을 노출시킨다.” 전쟁 중에 드러난 인간의 공격성은 전쟁이 끝나도 타인을 자꾸 적으로 보는 순간마다 고개를 든다. 전쟁가능국가로 개헌을 갈망하는 아베에게 한국은 결코 경쟁하고 협력하는 이웃이 될 수 없다. 아베형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늘 죽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인간의 본성은 연민(compassion)이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우파를 지지하는 적군과 마주했을 때 정작 사살하지 못했던 일을 회고한 바 있다. 왜 총을 발사하지 못했을까? 프로이트가 보편적이라고 했던 공격 본능이 사라진 것일까? 찢긴 옷을 반만 걸치고, 바지를 움켜쥐고 헐떡거리는 타인의 겁먹은 눈을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또 다른 인간의 보편적 본능 때문이 아닐까?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병사 중 오직 15%만이 적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는 보고서도 이런 연민의 본성을 잘 보여준다. 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면 독립군의 포로가 된 젊은 일본군이 등장한다. 그는 여느 일본군에게서 보이는 공격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그저 극적인 감동을 위한 연출이었을까? 그가 포로로 독립군과 함께하면서 일본군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타인의 눈물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 아닐까?
지난 1400회 수요시위에서는 역대 최대인 2만명이 모였다. 수요시위의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다. 수요시위를 단순히 정치성이 강한 이들의 시위행사 정도로 여기면 큰 오산이다. 몇 해 전 나는 사회봉사 과목을 수강하는 대학생들과 수요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우리 일행 옆에는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왔다는 여고생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그중 가장 감정에 복받쳐 있는 학생에게 물었다. 저 할머니와 개인적 친분이 있냐고. 그 학생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멘트를 날렸다. “아니, 저보다도 어린 나이에 저런 일을 당하신 거잖아요?” 그러고는 그 여학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인간 내면에 연민의 본성이 없다면, 누구도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수요시위에 나올 수 없다. 연민의 본성으로 가득 찬 수요시위형 인간은 일본의 사죄를 목 놓아 외치지만, 아베형 인간은 미동도 없다.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공격 본능에 충실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공격과 연민의 본성을 모두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이 지구라는 별에 함께 살아가면서 어떤 본성에 더욱 이끌리는지는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을 국가안보의 가장 큰 적이라고 주장하는 야당 지도자는 아베형 인간일까? 아니면 수요시위형 인간일까? 적의 죽음과 공격만 생각하는 아베형 인간보다 피해를 입은 이들의 상처를 함께 느끼는 수요시위형 인간이 이 땅에도, 그리고 일본에도 더욱 많아지길 소망한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상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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