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결심 알리자 아들이 "아버님 존경스럽다"
금혼식 비용 기부했을때 큰 행복감
'좋은일 하는게 이거구나' 깨달아
한때 동료들에게 "짜다" 소리 들어
한국 영화 발전에 작은 밑거름 되길
천상 '배우'다. 팔십을 넘긴 노신사(老紳士)가 정말 꼿꼿하다.
짙은 남색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 작은 물방울이 빼곡한 넥타이로 매치한 뒤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으로 포인트를 줬다. 깔끔하다. 1960~70년대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미남 스타의 풍모가 여전하다.
원로배우 신영균(82) 전국 민영방송 협의회 회장은 '아름다운 기부'로 삶을 갈무리하고 있다.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은 신영균이 누구인지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1960년 조긍하 감독의 영화 '과부'로 데뷔한 신영균은 치과 의사였고, 한국 영화계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배우였고, 영화 예술 행정가였고, 정치인이자 사업가였다. 언제부터인가 '영화계의 재벌'로 불릴 만큼 재력가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행복한 할아버지'다.
영화 예술 발전을 위해 사재 500억원을 기부했다. 공익 재단을 만들어 유능한 영화인을 발굴하고 지원해 한국 영화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려는 것이다.
50년전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 배우를 그만뒀을 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시작한 명보제과를 기반으로 마련한 서울 중구 초동의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과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리에 있는 신영영화박물관을 지난 5일 사재 기부 기자회견을 갖고 영화계에 내놓았다.
기부를 결정하자 아들 신언식 한주에이엠씨 회장은 "아버님이 존경스럽다"고 했고, 딸 신혜진 세영 엔터프라이즈 대표는 "아버지는 참 멋쟁이"라며 환영했다. 손자들 역시 "존경한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평생 반려자로 묵묵히 내조하고 있는 아내(김선희씨)도 "장한 일을 하셨다"며 남편과 뜻을 같이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했던 일을 가족들의 도움으로 결정하고 나니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제 뜻을 한번도 거스르지 않고 늘 곁에서 힘이 되어 준 아내와 '우리는 먹고 살만 하니까, 좋은 일을 하시라'고 마음을 열어준 자식들이 있었기에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명보아트홀 6층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는 남궁원, 윤양하, 거룡, 최지희 등 옛 동료 배우들과 많은 영화에서 연출을 맡았던 김수용, 심우섭 감독 등이 함께 자리했다. 영화계 후배인 이덕화, 안성기도 대선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영화를 찍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어려웠어요. 나는 영화배우로서 연기하다 죽으면 명예로울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부업의 필요성을 느꼈고, 명보제과를 시작했습니다. 배우는 인기가 떨어지면 참으로 외롭습니다. 부디 후배들도 노후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길 부탁 드립니다."
신영균은 옛날 영화 촬영장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61년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을 찍을 때다.
"이렇다 할 효과 장치가 없다 보니 영화의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실탄을 쐈어요. 배우들이 달여가면 옆으로 총을 마구 쐈어요."
1964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빨간 마후라'를 찍을 때도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전투기의 조종간을 잡고 죽는 라스트 신을 찍는데 유리를 뚫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군에서 1등 사격수를 직접 데려와 내 머리 뒤에서 총을 쏘도록 했어요. 바로 뒤에서 쏘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지만 사람이 겹치니 10m 뒤에서 총을 쏜다는 거에요. 불안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영화배우 신영균은 1978년 김수용 감독의 '화조'까지 18년의 연기 생활을 통해 총 294편을 작품을 남겼다. 특히 사극 출연이 많았다.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1961년), 최인현 감독의 '태조 이성계'(1962년) 등을 찍을 때면 어김없이 말을 타야 했다. 제대로 조련되지 않은 말을 타고 내리막을 달리는 장면을 촬영할 때면 어떤 사고를 당할지 예측불능이었다.
그래서 부업을 시작했다. '가게 운영하랴, 아이들 키우랴, 남편 일정과 의상 관리하랴' 아내가 1인3역을 맡았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시절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김선희씨를 만나 1956년 결혼했다. 아내는 지금도 "치과 의사니까 결혼했지, 소위 '딴따라'였으면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성고를 졸업한 뒤 극단 '청춘극장'에서 활동하고, 서울대 시절에도 총학생회 연극부를 창립해 이끌어나가던 '끼'가 서른이 넘어 발동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영화배우'로 살게 됐다.
"나는 영화배우로서 어려운 꿈을 이뤘습니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사랑해준 많은 분에게 감사하며, 영화를 사랑하는 후배들을 위해 이젠 좋은 일을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김수용 감독께선 嚮“?'재벌, 재벌'하셨는데 배우로서 조금 돈이 있는 정도입니다. 지금은 돈이 다가 아니란 걸을 잘 알고 있는 나이도 됐구요."
결혼 50주년이던 2006년 화려한 금혼식을 하기 위해 하얏트 호텔을 예약했다. 칠순, 팔순 잔치는 가족들과 조촐하게 보냈지만 금혼식만은 영화계 인사들은 물론 정·재계의 많은 지인들 초대해 멋진 자리를 만들려 했다.
"금혼식을 앞두고 불현듯 이렇게 돈을 없애는 것보다 기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도 흔쾌히 동의했구요. 그래서 금혼식 비용을 모두 신문사에 기부해 고아원 등을 돕는데 쓰도록 했어요. 아쉬움보다 행복감이 들더군요.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 이런 거구나 알게 됐어요."
한 때 영화계 동료들에게 '짜다'는 소리를 들었다.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미처 주변을 챙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재산의 사회 환원에 대한 의지를 굳혀나갔다. 자신의 히트작 '연산군', '5인의 해병', '빨간 마후라'등 숱한 영화를 개봉하는 등 가장 애착이 가는 재산 중 하나인 명보극장을 기부하기로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은 극장 문화도 많이 변했습니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복합 건물로 재개발한 스카라 극장이나 국도 극장처럼 바꾸면 더 큰 재산 가치가 있겠지만 한국 영화의 산실인 충무로와 지근 거리에 있는 이 곳을 영원히 영화인들의 명소로 지켜가는 것이 더 뜻깊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제 원로배우 신영균은 가장 사랑하는 극장과 박물관을 사회에 내놓고 일선에서 물러나 그동안 소홀했던 옛 동료들을 만나 소일할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 꿈이 남아 있다. 죽기 전에 좋은 영화에 한번 더 출연하는 것이다. '영원한 영화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