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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56년 홍콩의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장궈룽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 영국 리즈대학 섬유관리학과를 졸업했다. 장궈룽은 지난 1977년 홍콩 ATV가 주최한 아시아가요제에서 2위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하자 1979년「열화청춘」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는 홍콩 TVB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주제곡을 함께 불렀고 음반 `풍계속취'와`모니카'가 3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가수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장궈룽은 특히 국내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영화「영웅본색」에서 조직폭력배를 형으로 둔 경찰역으로 나와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또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천녀유혼」에서 그는 왕쭈셴과 같이 출연해 국내에 천녀유혼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도쿄가요제 참가 당시 톈안먼사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1990년 은퇴를 선언했으며 당시 10대 소녀팬들은 자살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지난 2003년 4월 1일 모 뉴스통신사에 올라왔던 기사이다. 아무도 믿고 싶지 않았던 만우절의 거짓말이라 믿었던...
어느새 6년이 지났다.
그냥...... 죽은 사람들은 웬지 그립다. ....... 그들이 남긴 발자취가.. 그리고 그 숨소리가 가끔은 그립다.
.... 가족도...
섬유관리학과를 졸업했다. 장궈룽은 지난 1977년 홍콩 ATV가 주최한 아시아가요제에서 2위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하자 1979년「열화청춘」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그는 홍콩 TVB의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주제곡을 함께 불렀고 음반 `풍계속취'와`모니카'가 3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가수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장궈룽은 특히 국내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영화「영웅본색」에서 조직폭력배를 형으로 둔 경찰역으로 나와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또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천녀유혼」에서 그는 왕쭈셴과 같이 출연해 국내에 천녀유혼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도쿄가요제 참가 당시 톈안먼사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켜 1990년 은퇴를 선언했으며 당시 10대 소녀팬들은 자살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