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엔 비가 좀 뜸하긴 해도 경자년에 들어서 가뭄이 좀 심했다. 그 좋아하는 눈도 올해는 예년에 비해 많이 모자랐다. 덕분에 낙엽의 비명은 더 커지고 마른 먼지가 콧구멍으로 마구 들이닥쳤다. 뜻밖의 코로나19에 발목이 붙들려 문지방이나 지키다가 5월에 들면서 조금 사정이 나아졌다. 기후가 달라지고 시절을 아는 고마운 비가 드문드문 내린다. 빗소리를 인수분해하면 물과 소리이다. 물은 공중에서 떨어지고, 소리는 지상에서 나온다. 세상의 만물은 어찌할 수 없는 기쁨과 서러움을 아무도 몰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가 보다. 하늘이 손을 길게 뻗어 툭툭툭 건드려주면 저렇게 화들짝 놀라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비 오는 보성의 대원사 계곡. 잠깐이 아니라 아예 작정을 하고 비와 함께 한나절을 섞여야 하는지라 우산 대신 우의를 걸쳤다. 비가 비닐에 부딪히자 조금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소리가 났다. 양철 지붕을 두드릴 때의 그 경쾌하던 소리는 내 머리통을 때릴 땐 그저 밋밋하고 둔탁할 뿐. 다만 아주 오래전, 선배의 자취집 냉장고 문짝의 메모지에서 본 이래 한 시절 동무해준 시 한 편을 호출해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베르톨트 브레히트) 이 산중에 내리는 비는 그래도 운이 좋다. 같은 먹구름에서 출발했더라도 저 멀리 바다에 바로 떨어지는 비도 있을 것이다. 이렇다 할 꽃은 거의 없는 풍경에서 비에 젖는 나뭇잎들이 눈을 뜨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당단풍나무의 잎들. 봄잎에 가을의 단풍 들 듯 불그스름한 빛이 감돈다. 공구통에서 떨어져 팽그르르 도는 나사처럼 현란한 잎사귀들. 장마가 오고 태풍이 지나가도 맨 마지막에 오는 빗방울은 저렇게 따로따로 홀로 떨어진다. 숲에서 뛰쳐나왔다가 주춤거리는 어느 순한 짐승의 앞발 같은 당단풍나무의 잎. 그 끝에 눈물처럼 매달린 빗방울, 빗방울, 빗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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