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엔 박은해 기자]
악역에게 서사는 사치였다.
SBS 금토드라마 '모범택시'(극본 오상호/연출 박준우)가 서사 없는 악역의 깔끔한 퇴장을 그리면서 호평받고 있다.
5월 1일 방송된 '모범택시' 8회에서는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고 갑질을 일삼은 유데이터 박양진(백현진 분) 회장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김도기(이제훈 분)와 무지개 운수 식구들 모습이 그려졌다. 극 중 국내 최대 웹하드 유데이터는 불법 촬영된 음란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악덕 기업. 게다가 박양진은 불법 촬영물 유포 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피해자 영상을 유작으로 업로드하라고 지시하는 등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물이었다.
유데이터 편은 2주에 걸친 긴 에피소드였지만 빌런 박양진의 과거사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저 박양진이 얼마나 극악무도한지, 어떻게 직원들을 괴롭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 속에 살게 했는지만을 그려냈다. 불우한 과거로 삐딱한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거나 악역 또한 다른 범죄의 피해자라는 둥 미화 요소도 전혀 없었다. 덕분에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나쁜 짓만 질리도록 한 박양진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통쾌했다.
박양진뿐만 아니라 전 회차에 등장한 지적장애 여성을 폭행하고 노동력을 착취한 젓갈공장 사장, 동급생을 잔인하게 괴롭힌 일진 역시 악행만을 적나라하게 묘사했을 뿐 캐릭터에 다른 서사를 부여하지 않았다. 악역은 악역일 뿐, 잘못된 행동에는 어떤 당위도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목이었다. 악역의 기구한 사연으로 시청자들을 어쭙잖게 설득하려 들지 않는 깔끔한 전개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간 시청자들은 악역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듯 서사를 부여하는 드라마 전개에 여러 번 반감을 표했다. 지난해 MBC '365'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즐거워하는 사이코패스 이신(김지수 분)의 눈물나는 모성을 두고 "신파로 죄질을 희석하려 한다"는 비판 의견이 제기됐다. tvN '경이로운 소문'에서도 악귀에 빙의돼 여러 사람을 죽인 지청신(이홍내 분)의 불우한 과거, 남을 가엾게 여기는 인간적인 면모는 "캐릭터 붕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한편, 이날 방송에서는 유데이터에 위장 취업한 김도기는 피해자들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데이터를 삭제했지만 충격적이게도 유데이터 서버는 무한 복구되는 시스템이었다. 불법 촬영물을 완벽히 없애기 위해서는 영상 데이터를 보존하는 광산을 파괴해야 하는 상황. 불법 촬영물로 인해 언니를 잃은 안고은(표예진 분)은 눈물을 머금고 언니 영상으로 트래픽을 일으켜 광산 위치를 파악했고, 김도기와 무지개 운수 식구들은 박양진을 처단하고 광산을 깨끗이 없애버렸다.
악역에게 서사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통쾌한 복수 중인 '모범택시' 앞으로 전개에 기대가 모인다.
(사진=SBS '모범택시'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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