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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신화첩기행
싼타오 | 2020.03.23 | 조회 261 | 추천 1 댓글 3

그리운 이여, 오늘은 사과나무 한 그루의 사연으로부터 이 편지를 시작하려 합니다. 며칠 전 새벽 산책길에 우연히 올려다본 허공에는 강하게 쏘는 붉은 빛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여기 저기서 폭죽처럼 붉은 빛들이 터지고 있었습니다. 이 회색도시 한가운데 내가 사는 아파트 뒷마당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저홀로 자라 그토록 청정한 빛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웬 사내가 나무 한 그루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요새 나는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그 사과나무로 인해 행복합니다. 창조주가 은실을 짜듯 열어놓은 하루의 첫 새벽에 그 빛나는 열매들과 만나는 것은 나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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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유진규의 ´묵극´은 문명의 풍자와 고발, 환희와 고통, 슬픔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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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으로 가면서 나는 마임배우 유진규가 우리 예술계에 숨겨진 사과나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하고도 도심인 방배동의 탁한 대기 속에서 한 그루 사과나무가 저홀로 기쁨의 열매들을 맺고 있듯이 유진규라는 사과나무도 이 시대의 탁한 대기 속에서 예의 빛을 영롱하게 내뿜고 있는 신비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 나무는 수향 춘천의 물가에 심겨져 아침 저녁 피어 오르는 물안개와 새벽 이슬과 저녁 노을을 먹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그 유진규를 다시 만난 것은 실로 십여년만의 일이었습니다. 황혼이 내리는 의암호 저편에서 그는 내게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와 나 사이로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 같은 모습과 상큼한 미소는 여전하였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가 하고 있는 일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무얼 먹고 사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맑게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원래 나는 소식가”라고.

예전에 서울의 신촌 시장 들어가는 골목 한쪽에는 이제는 전설처럼 되어버린 ‘76소극장’이 있었습니다. 연출가이자 배우인 기국서, 기주봉 형제가 주머니 돈을 털어 이끌었던 이 집에는 장안의 기질 많은 사내들이 모여들었고 마임이스트 김성구와 유진규도 나와 함께 그 안에 있었습니다. 서양식의 호사한 살롱 드라마 같은 것과는 달리 공연 때면 시장 안의 그 가난한 공간에서는 효과음처럼 신촌 역 기차소리가 들리곤 하던 곳이었습니다. 온갖 차량의 소음과 시장 바닥의 소리들이 먼지처럼 부유하는 그 공간에서 그러나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소원이라면 오직 하나, 그 곳이 세를 못 내어 문을 닫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소원은 무너져 골목 안 극장은 문을 닫게 됐고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소극장을 떠나던 날은 하늘을 메우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빽빽이 내리는 눈 속에서 그와 나는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서울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돌아서면서 이런 말을 보태었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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