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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북기 | 2020.03.24 | 조회 215 | 추천 0 댓글 1

[성석제의 독서일기]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이십여 년 전 나는 집근처에 있는 헌책방에서 얄팍하고 길쭉한 책 한 권을 발견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책상은 책상이다』였다. 그 책 옆에는 『돼지는 돼지다』라는 책도 있었다. 나는 그때 『책상은 책상이다』를 선택했고 훨씬 더 재미 있을 듯한 『돼지는 돼지다』는 곧 마셔야 할 막걸리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시를 쓰고 있어서 시적인 문체에 저명한 시인이 번역한, 좀 고상하고 공부할 거리가 많은 듯한 『책상은 책상이다』가 더 값지게 보였던 것이다.

몇 달 뒤에 대전에 사는 누이의 집에 다니러 갔다가 나는 『모세야, 석유가 안 나오느냐』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책의 저자가 곧 『돼지는 돼지다』의 저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돼지는 돼지다』는 『책상은 책상이다』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제목을 붙인 게 틀림없었다. 한 사람은 스위스, 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두 사람의 책은 모두 독일어권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었으니까. 『모세야...』의 표지에 적힌 저자의 이름은 에프라임 키션이었다. 『가족』이라는 소설을 후에 보게 됐는데 『모세야...』와 마찬가지로 주변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을 유별나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이웃집의 말 많은 아저씨의 면모는 여전했다.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으로도 얼마든지 국가정책과 우주의 끝,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키션의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다. 한밤중에 어느 집에서 창문을 열고 라디오를 한껏 크게 틀어놓았다. 소리 줄여, 좀 꺼라 자식아, 이 아파트에 저만 사나, 라디오는 저만 있나 하고 와글거리던 이웃주민들은 「누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가지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예술도 모르는 무식한 것들!」이라는 주인의 고함에 움찔한다. 그 뒤에 그들은,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은, 역시 웅장하고 심원한 그의 음악 세계는, 역시 지휘자는, 역시 교향악단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 음악을 상찬하는 데 경쟁적으로 열을 올린다. 음악이 끝나자 라디오에서는 「지금까지 슈베르트의 아무 곡이었다」고 알린다. 무안해진 주민들은 결국 하나씩 둘씩 베란다 문을 닫고 만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바로 이 이야기의 연장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현대미술로 바뀌었을 뿐이다. 베토벤에 대응하는 요셉 보이스, 앤디 워홀 같은 현대미술의 거장은 「망가진 재봉틀과 몇 가지 부엌집기들을 가지고 5분내에 현대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익살 9단이라는 게 키션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 익살을 동네 주민에 해당하는 미술 소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그로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내게 떠오른 수많은 익살과 기지로 비평가들을 만족시켰다. 그들이 나의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끄집어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이것은 20세기 미술의 교주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고(진위의 시비는 있지만) 「나는 예술애호가들의 얼굴을 향해 나의 병 스탠드와 실내용 변기를 내팽개쳤다. 그들을 화나게 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 창작품의 미적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는 네오다다이즘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의 말이다. 에프라임 키션은 이런 사람들에 대해 「하자없는 유머리스트로서, 풍자가로서 나의 위대한 동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들의 「작품」 앞에서 소리내어 웃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긴다. 왜 웃지 못할까. 누군가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는 바로 라디오의 주인, 곧 현대미술의 원리를 수호하는 예술 마피아들이다. 「검은색의 상의를 입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미술 상인과 이를 뒷받침이라도 해주는 듯한 몇몇 이름있는 비평가들」과 그를 찬양하는 매스컴,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그 예술품을 사들이는 부자들이다. 그는 그 위선과 가식과 정실의 가면을 벗기고자 한다. 그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시대의 뻔뻔스럽고 교활한 자들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 풍자적 기질의 소유자였던 아마추어 이론가가 있었음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 한다. 그가 유머리스트이고 풍자가라는 것을 상기해볼 때 당연한 일이다.

현대 예술의 「대가와 거장, 교주」들의 「웃기는」그림이 보너스다. 원색 인쇄 치고는 책값도 싸다.


사족 : 「이런 책은 까고 웃기기만 하지 대안은 없다」고 말할 돌대가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대로 깔 줄만 알아도 훌륭하다. 제대로 까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밤, 호두, 호박씨를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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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봉 | 추천 0 | 03.24  
좋은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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