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 온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결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 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문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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