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H사건(1979.8.)
(한길사, 한국사-19, 1994, 25)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농성과 김경숙의 사망을 보도한 1979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
YH무역주식회사는 1966년 1월 자본금 1백만원과 10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종업원 4천명에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하였고 수출실적 1백만 달러를 달성하여 국내 수출순위 15위를 기록하였다.
회사 순이익이 12억 7천만원이나 된 이 해에 상당액의 외화를 도핀시킨 장용호 회장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동서인 진동희 사장은 장부상 10억원을 사원들의 상여금으로 지급했다고 해놓고 그 돈으로 1973년 대보해운을 설립하였다.
와이에치 노동자들은 하루 13-14시간씩 근무를 하였고 일요일도 격주로만 쉴 수 있었다.
일체의 수당과 상여금도 없었다. 와이에치 무역은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의 와이에치 무역에서 수출한 가발대금 3백만 달러를 미국의 장용호 회장이 갚지 않아 1974년에는 은행빚이 6억 3천만원으로 늘어났다.
사세는 급속도로 기울어졌고 1979년 4월에는 폐업을 단행하였다.
7일 동안 농성 끝에 공장문은 다시 열렸으나 미국으로 빼돌린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7월 30일 2차 폐업 결정이 났다. 기숙사에서 농성하던 와이에치 여성노동자들은 8월 9일 신민당사로 농성장을 옮겼다.
8월 12일 새벽 2천여명의 경찰력에 의해 1백 80여명의 18세에서 23세에 이르는 나이어린 노동자들은 강제로 끌려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추락하여 꽃다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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